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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Dec 12. 2022

언어와 애정의 관계에 관하여

모든 관객에게 동등한 언어란

영상 언어에서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언어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의 자막을 넘어 다양한 영화에 접근해달라고 영어권 관객에게 부탁했을 만큼 귀에 들리는 언어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막강하다. 때문에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은 자막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과는 달리 더빙을 선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와 영국 영화가 상대적으로 흥행하기 쉬운 이유는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똑같이 자막을 보더라도 상대적으로 귀에 익은 영어권 영화가 선호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번역가 황석희는 최근 관객들은 영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편이기 때문에 잘못 번역하기라도 하면 항의가 들어오기도 쉽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렇듯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는 관객의 모국어, 그리고 구사 가능한 언어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홀연히 등장한 <페르시아어 수업>은 국가조차 생소한 페르시아어를 다룬다. 물론 실제 페르시아어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등장하고,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와 약간의 프랑스어 그리고 질(혹은 레자 준/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다.


유대인을 말살하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질은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코흐 대위(라르스 아이딩어 분) 덕분에 총살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때까지 관객은 질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실제 페르시아어 구사가 가능한 인물인지 알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 다수의 관객이 페르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선택한(놀랍게도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지만) 언어인 페르시아어는 지구상 관객의 절대 다수를 상대로 너무나 손쉽게 심리 게임을 시작한다. 영화 초반이 질이 실제 페르시아인인가 아닌가로 관객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면 이후부터는 질이 만들어내는 가짜 페르시아어가 서스펜스를 담당한다. 스스로 페르시아인이라고 지칭하지만 영화 내에도 페르시아어 구사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코흐 대위는 질의 페르시아어가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길이 없다. 때문에 질로부터 페르시아어를 배우면서도 의심하고,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걸 아는 병사들은 이를 증명하려 하지만 이들도 페르시아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증명할 길이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은 질이 실수로 같은 단어를 다른 두 의미에 갖다붙였을 때다. 이미 사용한 '라지'라는 단어를 '나무'에 재사용한 질은 코흐 대위로부터 의심을 사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로 살아남는다.



희한한 것은 질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질과 가짜 페르시아어로 대화하는 코흐 대위에게서 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질의 거짓말을 거의 잡아냈을 때 코흐 대위의 분노는 사기당한 자의 배신감보다는 애정을 거절당한 배신감에 가깝게 보일 정도다. 병사들에게 자신의 식량조차 잘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고 무뚝뚝한 코흐 대위는 유독 질에게만큼은 애정을 보인다. 겉으로는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질에 대한 편애는 같은 병사들조차 이상하게 볼 정도다. 질이 전출되지 않도록 해서 계속 곁에 남겨두거나 귀한 고기 통조림을 나눠주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알아서 도망치려는 질을 쫓아가 붙잡아 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질과 코흐 대위의 가짜 페르시아어 대화는 마치 사랑의 밀어처럼 들린다. 코흐 대위는 독일어로는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지만 가짜 페르시아어로는 가족사를 털어놓는다. 질은 결코 의도적으로 코흐 대위를 조종하려 하지 않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질에게 코흐 대위는 사랑의 인질이 된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가짜 페르시아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질이 창조한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관객도 뉘앙스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한할 만큼 가짜 페르시아어에서는 질에 대한 코흐 대위의 애정이 드러난다. 가짜 페르시아어는 오로지 의미만이 전달되는데도 전세계 모든 관객이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랑의 밀어가 된다. 더 재미있는 점은 극중에서 가짜 페르시아어가 가짜라는 걸 모르는 건 코흐 대위뿐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질과 함께 잡힌 유대인들도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대다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병사들조차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진짜 페르시아인은 이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지기까지 한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고 하는데 코흐 대위는 그야말로 눈과 귀가 멀어 가짜 페르시아어로만 진실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영화의 메인 언어인 독일어의 권력을 가졌어야 할 코흐 대위는 가짜 페르시아어라는 언어 하나로 권력의 위치를 잃지만 그걸 모르는 건 본인뿐이다.



질이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언어의 자연발생 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최초에는 적당히 단어들을 만들어 내던 질은 한계를 느끼고 단어의 소스를 찾아 헤매다가 유대인의 명단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수많은 단어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이름은 영화에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맥거핀으로 작용하는데 질은 극중에서 본명이 아닌 페르시아식 가명 레자 준으로 훨씬 많이 불린다. 코흐 대위가 이 서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질의 본명을 알지 못하고 가명으로만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사물의 이름이 다양한 서사에서 갖는 함의를 생각해볼 때 누군가의 본명을 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는데 코흐 대위는 질로부터 가명과 가짜 언어밖에 선사받지 못하고 스러진다. 반면 질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단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명단이 부족해지자 마주치는 유대인마다 이름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로부터 단어를 생성해내 코흐 대위에게 전달한다. 텅 빈것만 같은 가짜 언어는 유대인인 질에게 나치 대위인 코흐를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환된다.


이름과 애정의 관계에 대해 영화가 암시하며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도와준, 말 못하는 유대인과 옷을 바꿔입은 질은 코흐 대위에게 붙잡혀 온다. 코흐 대위는 왜 이름도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냐고 묻는데 질은 이 우문에 현답으로 대답한다.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질의 현답은 사실은 영화 전체를 꿰뚫는 날카로운 답변이다. 질이 살아남은 이유는 코흐 대위에게는 애정이 없는 가명을 알려주는 대신 그 자신은 진짜 이름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 장교들은 역사를 지우기 위해 명단부터 태워버리지만 그 명단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질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억한 이름들은 생존의 수단이자 그 자체로 역사의 증거로 기능하며 관객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코흐 대위는 영화 내내 질(레자)를 향한 애정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를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코흐 대위의 애정은 집착에 가까웠으며 시혜적이었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서사다. 반면 질은 자신이 먹기에도 모자란 음식을 나누고 그 보답으로 생존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은 애증의 서사가 마무리될 때 진정으로 살아남은 건 진실한 애정을 갖고 이름을 기억했던 질이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관객과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주고받고, 등장인물들과는 애증관계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며 이름과 언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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