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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02. 2023

내면과 외피, 그리고 정체성

왜 키리만이 정체성을 고민하는가

10년도 더 전에 등장해 CG계에 혁명을 일으켰던 작품 <아바타>는 정체성에 관해 다소 진부하지만 의미있는 이야기였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 분)는 하반신이 마비된 인간으로서 장애가 없는 아바타 신체에 올라타자마자 그 자유로움을 만끽하지만 끊임없이 인간과 아바타의 신체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나비족인 네이티리(조 살다나 분)와 사랑에 빠지고 나비족의 문화에 스며들었을 때에야 인간의 신체를 포기하고 아바타의 신체로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다. 제이크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나비족에 스며들어 연구 및 착취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바타의 신체를 이용했다면 나비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한 후에는 아바타 신체로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미루어 제이크의 고민이 생략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우월한 신체를 선택한 것만이 아니라 제이크는 나비족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며, 이는 <아바타>에서 마지막까지 아바타 신체 대신 기계신체로 전투를 벌이는 쿼리치 대령(스티븐 랭 분)과 대비된다. 쿼리치 대령은 나비족보다 인간족이 우월하다고 굳게 믿는 부류이며, 따라서 나비족 신체인 아바타보다 기계가 전투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속편 <아바타: 물의 길>에서는 쿼리치 대령도 아바타 신체를 통해 부활한다. 전편의 제이크와는 다르게 쿼리치 대령에게는 인간의 신체로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없다. 쿼리치 대령은 아바타의 신체에 쿼리치 대령의 기억이 삽입된, 자신과 인간 쿼리치는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영화 중반 스파이더(잭 챔피언 분)와 나누는 대화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아바타 신체의 쿼리치 대령은 자신이 스파이더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혀둔다. 인간 쿼리치와 아바타 쿼리치는 별개의 인물이므로 아바타 쿼리치는 스파이더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바타 쿼리치의 단순한 생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의 입장에서는 유전적인 공통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푸른 쿼리치를 경계하는데, 이 경계는 쿼리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느슨해진다. 아바타 쿼리치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새로운 신체에 적응하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미루어 두는데, 이는 후반부 전투 장면에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주요 등장인물의 수가 다소 적고 비교적 단순한 서사를 취했던 전편과는 달리 <아바타: 물의 길>에서는 2세대가 등장하며 등장인물의 수가 늘어났다. 제이크와 네이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신기할 만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데, 아마도 숲의 나비족이 제이크를 온전히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에게도 나비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분), 로아크(브리튼 돌턴 분), 투크(트리니티 블리스 분)는 멧케이나 부족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사실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 아마도 인간족 출신임에도 토루크 막토라는 지위를 힘겹게 차지해낸 제이크가 숲의 나비족에서 족장으로 군림했기 때문일텐데, 제이크가 멧케이나 부족으로 이주하고 토루크 막토로서의 지위가 무용해지자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아이들은 정체성의 문제에 맞닥뜨린다. 이 아이들은 나비족으로서의 정체성과 더불어 숲과 바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이 모든 정체성의 문제는 물리적인 신체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손가락을 지나 얇은 팔과 꼬리에 다다르는 멧케이나 부족의 시선은 제이크가 인간의 공격이라는 재앙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부족에게 도움조차 되지 않을 것으로 정체성을 재단한다.


2세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키리(시고니 위버 분)다. 그레이스 박사의 딸인 키리의 아버지는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명확히 밝혀지는 바가 없는데 키리의 고민은 유전적 친부에 머무르지 않는다. 키리의 고민은 '왜 나만 남들과 다른가'로 발전하는데 이 문장 속 '남'에는 네이티리와 제이크의 아이들도 포함된다. 네이티리와 제이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적어도 친부모가 모두 살아있고 그 뿌리가 명확하기에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제이크와는 달리 인간의 신체로 살아갈 선택지가 없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는 나비족에서 족장의 아이들로서 자랄 수 있었다. 반면 키리는 네이티리와 제이크를 부모로 호명하며 자랐지만 그들이 친부모가 아님을 안다. 그리고 멧케이나 부족으로 이주해 에이와와의 교감을 시도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고민에 맞닥뜨린다. 키리의 고민은 단순히 키리가 유전적인 부모를 찾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양상의 문제가 아니다.



에이와와 교감을 시도했다가 발작을 일으킨 키리는 다시는 교감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그레이스 박사가 죽어가던 순간에 아바타 신체로 영혼을 옮기려다 실패하면서 에이와를 봤다고 발언한 전편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키리의 친부는 에이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키리는 에이와의 현신이자 일부일 수 있으며, 성경의 내용과도 등치된다. 제임스 카메론이 CG에 공을 들이면서 서사는 상대적으로 평이하게 직조함을 감안할 때 성경의 내용을 빌려와 키리를 창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키리는 언젠가 나비족과 인간족을 구원할 구원자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희생을 자처할 수도 있다. 교감은 희생을 위한 포석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키리는 숲에 사는 나비족의 신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가장 빠르게 물에 적응하고 해양생물체와 교감해 쉽게 적을 교란하고 공격한다. 그리고 선체에 갇힌 투크와 네이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 또란 키리이기도 하다. 키리의 정체성은 단순히 나비족이나 인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숙한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과는 다르게 5편까지 이어질 이야기의 포석 역할을 하기에 등장인물들의 정체성 고민에 쉽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쿼리치 대령은 스파이더에게 목숨을 맡기고 나서야 그를 아들로 호명하며 같이 갈 것을 부탁한다. 못난 둘째로서 형과 비교당하던 로아크는 그 자신이 맏형이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건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서다. 제이크는 아직도 가족과 군대를 구분하지 못하며 네이티리는 스파이더를 친자식처럼 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친자식과 분리한다. 그리고 키리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왜 에이와와 교감할 수 없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희한한 건 이들 가족이 멧케이나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려 하는 순간 이들을 인정하는 건 멧케이나족의 족장 토노와리(클리프 커티스 분)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멧케이나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이들의 가족이 희생해 멧케이나의 선조들 곁에 누웠기 때문이다. 탄생으로 정체성을 증명할 수 없다면 죽음으로 증명해내야 하는 다소 잔인한 방식이지만 1차적인 정체성 문제는 조금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름다운 화면을 매개로 오랜 서사의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를 서투르게 다룬다. 아직 후속편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결론짓기 이른 감은 있지만, 판도라 행성의 다른 곳에 스크린이 가 닿을 때에도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만을 지속할 수 있을지 궁금한 동시에 우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에도 키리의 활약을 기대하는 관객이 있을 것이며, 속편에서 키리는 자신이 평범한 나비족으로 살아가게 될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기능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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