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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Nov 08. 2021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손목시계를 보니 한국시간으로 밤 9시이다. 내 옆에는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졸린 눈으로 영화를 보고 있고, 창가 너머로는 하얀 구름산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실시간으로 비행기 위치를 보여주는 화면으로 우리는 러시아 상공을 지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와 아이들은 지금 프랑크푸르트행 KE 905편에 앉아 있다.

 



정확히 2년 반 전 남편의 주재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귀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내가 두 번 다시 해외 이사를 하나 봐라!’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하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달 전 남편은 독일지사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났다. 그 사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보, 그냥 자기 혼자 있다가 오면 안 될까? 나는 아이들과 이곳에서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는데…’


남편 혼자 머나먼 이국땅으로 보내고 생활비만 꼬박꼬박 보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고선 그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으면 했다. 그리고 차선의 방법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어느새 옷장에서 캐리어를 꺼내 묵묵히 짐을 싸고 있었다.


분명 마음은 바빠지는데 이상하게도 손과 발이 움직이는 속도는 매우 더디었다. 코로나 시국에 해외이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사는 동네를 떠나기가 싫었다. 정확히는 나의 의지와 선택과 상관없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이사는 분명 시간이 쌓은 견고한 틀을 깨는 모진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첫 초등 생활을 시작한 학교가 집 앞에 바로 있고, 밥하기가 귀찮을 때 언제든 달려가 먹을 수 있는 분식집과 빵집이 있었다. 처음 동네에 정착하며 느꼈던 경계심과 긴장감은 시간이 지나며 느슨해져 안정을 찾아갔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친구와 이웃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우리 동네에 진입하면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하고 푸근해졌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 이제는 그러려니 체념하고 산 나는 그렇다 쳐도 우리 아이들이 겨우 정 붙이고 사귄 친구들과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니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해외 이사를 몇 번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일이 수월하게 느껴진 건 아니었다. 아이들 학교 서류부터 입국 심사할 때 필요한 증명 서류, 하다못해 비상약 한 톨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노트에 적고 기록했다. 집안 곳곳에 숨어있는 짐을 다 꺼내 컨테이너에 넣을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하니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이사 당일 커다란 트럭에 이사 팀이 빛의 속도로 박스를 싣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떠난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지만.


출국 전 이삿짐을 보내는 일 말고도 우리 앞에는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드시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 확인 결과서를 손에 움켜쥐는 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는 늘 예상할 수 없는 변수를 품었다. 언제 어디서든 늘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나는 관문을 지나 어떻게 지금 비행기에 앉아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다. 비행기 안을 둘러보니 승객이 50명도 되지 않아 보인다. 듬성듬성 빈 곳이 너무 많고 기내에는 이상한 긴장감과 정적만이 흐른다. 코로나가 만든 이토록 기이한 현상에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탑승 전까지 여유가 없던 나는 이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카톡 메시지를 다시 훑어본다. 새로운 출발에 격려와 응원을 보내준 가족들, 친구들과 이웃의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온 느낌이 든다. 뭔가에 쫓기어 후다닥 한국을 떠난 거 같아 찜찜하기까지 하다.


“ 우리 비행기는 약 30분 후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


기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기내에 흐르고 있던 적막을 깬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곧 착륙이라니. 마치 누군가가 준비운동도 하지 않는 나를 차디찬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는 늘 완벽한 준비 따윈 없었다. 언젠가부터 내 삶의 신조가 되어 버린 ‘닥치고 적응’을 떠올렸다. 바람에 실려 정처 없이 떠돌다 어딘가에 머물지 모르는 꽃씨처럼 내 마음이 딱 그렇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끝나자마자 비행기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둥근 창밖으로는 자로 잰 듯 반듯한 네모 모양 논밭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빨간 지붕들이 보인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독일이구나.’


아빠를 만날 생각에 아이들은 한껏 들뜬 표정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안전벨트가  매여있는지 확인하고  안전벨트도 조금  세게 당겼다. 이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모든  맡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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