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베를리너
여행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기보다는 무작정 걷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는 걸 더 즐기고 좋아하는 편이다. 찬바람을 실컷 맞고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간 어느 카페에서 인생 커피를 맛본다면, 우연히 들어간 상점에서 그동안 사고 싶어 벼르고 있던 물건이 세일 가격에 놓여 있다면 정말 짜릿하기까지 하다.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를 끼고 떠난 베를린 여행에서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득 품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의 평가를 거쳐 입소문이 난 명소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반드시 그곳이 내 취향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계획 없이 떠돌다 우연을 마주할 때 훗날 여행에 대한 기억은 한층 더 풍성해지고 깊어진다.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장시간 운전을 하며 여행길에 올랐다. 베를린에 도착해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니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독일은 크리스마스이브 오후부터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베를린에 갔는데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으니 속이 상했지만, 크리스마스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의 여유는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저 지금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거리나 활보하자고 하고 돌아다니다 마침내 어느 문구 매장을 발견했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 선물을 고르고 계산을 하는 중에 문득 숙소에 들어가기 전 베를린을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책자 하나를 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혹시 이 근처에 서점이 있나요?'
직원에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어느 한 여자분이 마침 본인도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며 괜찮은 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방인에게 무조건 친절을 베푸는 이들을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말이 생각나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호의적인 말 뒤로 반전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다가온 성의를 단칼에 거절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누군가를 위해 고른 선물이 이미 그 사람 손 위에 놓여 있는 걸로 봐서 더 의심은 하지 않기로 했고,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해가 지고 난 어둑한 거리를 짧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어 가며 걷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발랄한 단발머리와 유난히 반짝이는 두 눈에는 젊음이 돋보였다. 현재 베를린에서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고 있고, 조금 전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남동생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골랐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점이며 그곳에 갈 때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고 알려주었다. 독일인이지만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지만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며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는데 지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계단을 내려간 순간 눈앞에는 꿈의 장소가 펼쳐졌다. 종이책들이 뿜어내는 비밀스러우면서도 따뜻한 공기에 둘러싸여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비록 독일어로 쓰인 책이 대부분이었지만 책들이 어찌나 예뻐 보이는지 이 책 저 책 구경하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 했다. 나는 완벽하다고 답했다. 아무 조건 없이 친절을 베푼 이에게 감사의 뜻으로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가방 안을 살폈지만, 새 마스크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마스크를 건네주며 인사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타지에서 낯선 이에게 마음의 빗장을 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친절을 기대하는 일도 일찌감치 접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날 움츠리던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듯한 신기한 경험을 했고, 앞으로 베를린을 떠올릴 때마다 그분과 함께 걸어 들어온 서점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만들어 낸 마법 같은 일인지 몰라도, 길을 몰라 헤매는 이방인에게는 하늘에서 내려 준 크리스마스 선물임은 분명했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행의 이유>, p.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