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무 업무를 주로 한다. 한 사건에서 분쟁의 일방을 대리하며 그 사건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함께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 사건에 있어서만큼만은 의뢰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늘 나를 찾아오는 분들은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분쟁 상황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의 희노애락 중 '노'와 '애'를 가장 많이 접하게 된다.
의뢰인들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왠만하면 의뢰인에게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정확히 말해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분노와 슬픔에 맞장구 쳐준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변호사의 의무는 전문가로서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때로는 가지 않은 길을 가보자고 제안하고 그러면서도 원치 않는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함으로써 얻을 이익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태도나 상담내용이 맘에 든 의뢰인이 나에게 사건을 위임하면, 그 후 사건 진행 과정에서 필요할 때마다 의뢰인과 연락하고 소통한다. 그때도 난 분통을 터뜨리거나 울지 않고 필요한 설명을 하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1년차 변호사일 때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의뢰인과 연락하는 데 할해했고 의뢰인 감정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제스쳐를 취하곤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종종 녹초가 되었다.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 에너지를 감정적 소모에 너무 빨리, 많이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서 더욱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노력한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변호사님들께서 그럴 것이다.
본능적으로 잘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ㅠ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실제로 순간순간에는 감정에 이입하기보다는 상황을 조망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근데, 요즘 내 노력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사건이 소위 말해서 잘 해결되어도 범죄피해나 소송으로 인한 상흔은 꽤 깊게 남는다. 그래서 변호사의 일은 끝나도 당사자의 마음 회복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건 결과가 안 좋으면 결과가 안 좋아서 마음이 아프지만, 결과가 좋아도 의뢰인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하며 마음이 아프고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내가 문제해결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여전히 난 오만한지 무력감을 느낀다.
얼마전엔 여러 사건을 진행하며 느낀 슬픔과 무력감이 한 번에 몰려와 눈물이 났다. 또 한 번은 다른 비참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상엔 왜 이렇게 힘든 사람이 많은 거냐' 하는 생각에 또 눈물이 터졌다.
개업변호사 2년차.
난 요즘 재미있는 게 별로 없다.
일과 육아로 인해 쉼 없는 일상에 지쳐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상의 비극들을 접하며 내 마음이 회의와 슬픔에 깊이 침잠한 탓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지나친 공감은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보단 악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공감 과잉의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어떠한가? 내 편에 대해서는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애정을 쏟는데, 그 애정은 곧 내 편과 다른 상대에 대한 무관용과 공격으로 이어진다.
변호사 원의림의 의뢰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의뢰인과 원의림 본인에게 이로울까, 아닐까?
사건 해결에는 때로 도움이 되는 거 같다. 공감할 수록 열정이 솟으니까. 그러나, 인간의 에너지엔 한계가 있어서 공감하면 할 수록 빠르게 지친다. 그리고 난 요즘 지친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나의 이 감정을 어떻게 통제하고 해소할 것인가? 분명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빠르게 해소하고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을 찾아가야 할 거 같다. 이미 일상의 과제가 산더미인데,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