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혼주의자에요.
아기는 예쁘지만 낳고 싶지는 않아요.
저 혼자 살건데 집을 꼭 살 필요가 있나요?
부부간의 사랑은 연애 때랑 뭐가 달라요?
서른 넷의 '아는 그녀'가 얼마전 물어왔던 질문들이다.
그녀는 예술을 하는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확실했으며 본인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가고픈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마치 어느 곳에도 속박이 되지 않은 듯 가벼이 떠 있는 사람이랄까. 나는 그 자유로움을 가끔씩 동경했고 동시에 묘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은 '비혼주의자'라고 밝히는 그녀에게 나는 꼰대처럼 비추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에게 결혼을 추천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당연하게 드러내지 못한 까닭은 이젠 누구라도 줄줄 읊어댈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파생하는 갖가지 문제들을 -몸소 겪고 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관계의 확장에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은 물론, 혼수마련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두 사람이 구축해 가야할 경제적인 부분이라던가, 부부생활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맞딱뜨릴 온갖 협의사안과 누군가에게로 치우치기 쉽상인 '양보와 희생'의 과정들이 분명 그들에게는 꺼려지고 두려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이해는 되지만 또 안타까움도 드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한 때는 나도 결혼을 굳이 하지 않았어도 좋았겠다 생각 한 적 있었다.
결혼 15년차를 지나고 있다 보니, 서로 일상을 부벼대다 생겼던 상흔들도 옅어져있고, 상대를 할퀴던 각자의 가시는 그 끝이 점점 둥글어 무뎌져있다.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넘어가 줄 수 있는 '인정'과 '수용'의 마음도 많이 훈련되었다. 눈치껏 싸움으로 번질만큼의 화까지는 돋우지 않는다. 윤슬을 입은 채 잔잔하게 일렁일렁이는 파도를 타다 때로는 바위에 철썩하고 흰 거품으로 부서지는 큰 파도도 맞는 것이, '부부'라는 이름을 선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서로가 좀 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걸 잘 알게 되었기에, 뜨거웠던 연애기의 사랑에서 적정한 온도를 비로소 찾은, 뭉근한 우정과 애정 어린 부부로 모습을 갖춰가는게 아닐까.
부부의 사랑은 어떤거냐고 물어온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뜨겁게 달아올라 심장이 방망이질치는 연애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책임자가 되어 지켜주는 마음이 더 크게 생기는 사랑이라고. 저울질하는 마음이 아니라 맞춰주는 마음이 되는게 부부의 사랑이라고.
늘 함께 하는 친구이면서, 가장 많이 걱정하고, 가장 많이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게 부부의 이름이라고.
비혼의 상태에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그 말이 지겹도록 싫었는데 정말 낳아보니 깨닫는 마음들이 있다. 맞딱드리고 경험해야만 알아지는 것들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을 지지하게 되기도 하였는데, 이왕이면 이런 것들을 총 인생의 한 부분에서 꼭 느껴봤으면 하는게 그녀를 아끼는 내가 말하고 싶은 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얼른 '임자'를 만나 진지한 사랑을 찐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혼을 지향하지만 아기는 너무 예쁘다던 그녀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공원을 나들이하는 모습을 , 우연히 지나다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혼자가 아니라, 뭉근하게 무르익은 사랑으로 묶여진 '관계'안에 있을 그녀를 기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