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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복희 Aug 07. 2022

시네마 네버 다이

<썸머 필름을 타고!>를 보고 

구글 검색창에 '미래에'까지 써넣으면 현재의 두려움이 보인다. 미래에 사라질 직업, 미래에 살아남을 직업, 미래에 생겨날 직업, 미래에 대한 명언, 미래에 대한 불안... 앞의 검색어들은 결국 마지막 검색어로 수렴될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어떻게 먹고살까'라는 불안. 언젠가부터 미래, 했을 때 알록달록한 심상을 떠올리지 않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지표가, 그러니까 치솟은 기온과 해수면뿐만 아니라 인간성도 종말을 가리키고 있는 현재에, 미래를 희망의 동의어로 쓰는 건 풋사랑에 빠진 노래 가사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시대에 태어나 그나마 운 좋은 점이라면 세기에 거쳐 발전해 온 영화들을 마음껏 누린다는 것이다. 시대를 함께 해온 이들의 첫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의 5년 뒤, 10년 뒤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몇 안 되는 낙관이다. 지난 2년 간 작은 영화관들이 문을 닫고 영화제가 축소되며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영화관과 나의 시간'이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과거의 영화를 부지런히 다시 보는 것이었다. '영화관과 나의 시간'의 의미를 곱씹고 글을 쓰며, 안일하게 누군가가 영화관을 지켜주길 바랐다. 팬데믹이 끝나면 영화관이 살아나겠지. 감독들이 밀린 신작을 쏟아내겠지. 미래에 영화가 사라진다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하니까, 인간 사이엔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화를 멈출 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에는 영화가 사라진 미래가 등장한다. 1분이 넘는 영상을 보는 사람이 없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시대에 존재하는 소년이, 자신의 인생을 흔든 거장의 첫 영화를 보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여름으로 온다. 소년이 얼마나 먼 미래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10분도 안 되는 유튜브 영상을 1.25배속으로 보고 영화 한 편을 두세 번 끊어가며 보는 요즘의 나만 봐도 그렇게 먼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은 가속이 붙어 어쩔 줄 모르는 화차처럼 덜컹대며 디스토피아로 돌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속력을 더했을 뿐 훨씬 이전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는 푯값을 만 오천 원까지 올렸고 그보다 두세 배를 받는 특별관을 늘렸다. 만 오천 원 이상을 지불할 영화의 기준이 다른 관객들은 서로 멀어졌다. 비디오테이프가 사라진 미래의 인류가 VHS 필터에 열광하듯이 미래의 영화관은 돈을 쓰는 이들의 취향에 따라 존재할 수 있다. 비록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간은 아닐지언정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관이 사라지지 않아도 나의 '시간'은 누적을 멈춘 추억이 되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아마 외면한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영화관을 지켜줄 거라 여겼듯이 누군가는 오로지 이야기만을 위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잠 못 자고 배고파도.


당장 현재에도 영화관에 가면 상영 전에 강말금 배우가 고독한 킬러처럼 등장하는 누아르 '무엇'을 보여준다. 무엇이냐면 그의 피 묻은 옷을 "알아서 맞춤 세탁"해주는 삼성 AI 세탁기 광고다. 거의 영화네, 내가 중얼대자, 저런 영화 나왔으면 좋겠다, 옆 사람이 속닥였다. 미래의 영화는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렇게 변형될 가능성이... 크겠네? 그걸 영화라고 할 수 있나? 글쎄 좋게 말하면 창작자들이 생계 압박을 덜어둔 채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소비자들은 일상의 경험이 예술이 되는 윈-윈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좋게만 여겨도 되는 걸까? 가히 멀티밤에서 자유로운 드라마 없는 현재처럼 삼성 비스포크의 카피를 녹이지 않으면 강말금 배우의 영화를 볼 방법이 없는 미래라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나올 수 있을까?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를 하려고 만든 영화가 잉여로 여겨지는 미래라면.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 고등학생 감독 맨발은 미래에 영화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어차피 사라질 첫 작품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맨발을 설득해 결국 영화를 만들도록 한 것은 영화가 사라진 세상에서도 자신의 이야기에 공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래의 소년 린타로는 맨발에게 미래로 돌아가 꼭 영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린타로의 이야기는 더 미래의 누군가에게 닿아 영화를 만들게 할 수 있다. 맨발과 린타로처럼 큰 집합 바깥에 드문드문 서 있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영화라고, 드라마나 음악이나 소설책과 달리 오직 영화로 전하는 이야기만의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여전히 조금은 안일하게, 강말금 배우가 김초희 감독의 분신으로 <찬실이...>나 <우라까이 하루끼> 같은 영화를 계속 찍기를 바란다. (내심 그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박찬욱, 이옥섭, 윤가은, 이경미, 김태리, 조현철, 이정은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손희정, 김혜리, 이다혜, 임수연이 이야기에 응답하고. 나는 감탄하고 존경하며 근근이 나의 이야기를 덧붙일 것이라고, 수상 소감 마냥 구구절절 호명한 그분들은 모르겠지만 약속하겠다. 그렇다면 영화는 사라지지 않아.




*쓰면서 들은 BGM (영화 <메기> 삽입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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