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헤어질 결심>을 보고
같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서너 번 찾아가는 일은 실로 오랜만이다. 그건 나의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취미 중 하나였지만 2019년 <기생충>을 마지막으로 잠정 중단 중이었다. 그 이후 좋은 영화들이 여럿 있었어도 극장에서 장기간 상영하며 무려 두 시간가량 (심지어 마스크를 쓰고) 꼼짝없이 앉아있을 만큼 재밌고 1.5배 치솟은 푯값이 아깝지 않은 작품은 없었던 것이다. 넷플릭스까지 합쳐도 한 달에 영화를 한 편 볼까 말까 하는 시간을 보내던 중 들려온 박찬욱 감독의 새 작품과 영화제 수상 소식은 어쩐지 소원해진 옛 친구가 성공했다더라 하는 얘길 전해 들은 마냥 서먹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칭찬을 주머니에 숨겨놓고 콧구멍만 벌름댈 때처럼 든든한 느낌이기도 했다. 박찬욱은 내게 뭘 먹어도 평타는 치는 맛집인데 그래도 기왕이면 이번 작품 대존맛이었으면, 두 번 세 번 보러 갈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가졌으면, 기대했다. 어쩌면 이미 '좋아할 결심'을 하고 극장을 찾았을지도. 우... 진부한 문장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은 시점, 이미 2차 관람은 당장 내일이 좋을까, 하루 묵혔다 내일모레가 좋을까 생각하며 도파민이 퐁퐁 솟았다. 이 작품은 아주 실력 있는 셰프 군단이 아주 귀한 재료로 내 입맛에 딱 맞춰 만든 요리 같았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상상되는, 모든 감각이 감정을 느끼는 이런 경험이 바로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였고, 맞아 이래서, 하고 그걸 되새기게 하는 영화를 찾으면 그 자체로 또 기쁜데...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들떠 보이고 쑥스러워서, 혹은 정확히 풀어놓기보다 압도된 기분 덩어리를 즐기고 싶어서 한 마디로 퉁쳐버린다. 아 뽕 차오른다! 첫 번째는 집 근처에서, 두 번째는 좋아하는 영화관에 찾아가서, 세 번째는 동행과 함께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관람했다. 위에 신나게 늘어놓은 영화적 경험은 영화와 호흡을 맞추며 풍덩 빠져든 두 번째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다면 세 번째엔 다른 속도의 호흡으로, 한참 생각을 붙잡고 있다가 아차차 따라가길 반복했다.
영화를 붙들고 곱씹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나의 경험과의 접점에서 시작하기 마련인데, <헤어질 결심>은 이례적이다.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정작 영화의 단일한, 재료인 '사랑'은 내게 말문이 막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손희정 영화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핑계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런 유의 영화가 아니다. 어지간해서는 한 줌의 볕도 허락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 이포의 안개처럼, 사랑은 프레임 속에 밀도 높게 고여 있다.
그러니까 보통 '멜로 드라마'가 바나나맛 우유라면 이 영화는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138분 동안 얘기하는, 바나나를 으깨어 단단하게 뭉친 형태에 가깝다. 꿀떡 삼켜버리고 어~ 맛좋다~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2019년 영화 <미성년>에서 영주(염정아)가 자신의 남편과 불륜 관계로 임신까지 해버린 미희(김소진)에게 가정이 있는 남자인 걸 알면서도 그 지경까지 갔는지 묻자 미희는, '불륜 한 번 해 보면 그 마음 알 거라고' 한다. 딸깍... 그때 나의 버튼이 눌렸다. 도대체 그 마음은 무엇인가. 가정이 있든 전과가 있든 멈출 수 없을 만큼 불같은 미친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지극히 사적인 알고리즘으로 나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서 <박쥐>도 히치콕 영화도 아닌 <미성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블로그 이웃들이 <헤어질 결심> 후기를 올리면 말벌 아저씨처럼 쫓아갔다. 불특정 다수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면 구글링하거나 오타쿠들이 밀집된 트위터를 훑어보는 게 효율적이지만 나와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고 꼬치꼬치 물어볼 수 있는 특정 소수의 감상이 궁금했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끼리끼리 놀아서인지 주변에 미친사랑 서사를 가진 친구가 거의 없었지만... 용케 한 명을 찾아 긴 대화를 나눴다.
거참 글 쓰는 와중에 이런 얘기 좀 그런데... 앞부분을 써놓고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새 이 주제에 흥미가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기세 좋게 시작한 글을 미루기엔 찜찜하고... 나는 사랑에 관해 탐구하는 글에게도 책임감 내지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긴 대화 중에 J가 내 조촐한 연애 이력에 붙인 코멘트가 그랬듯이. 책임감과 의무감이 대단하군요. 그것이 (일대일 종속관계 간의) 사랑에 관한 현재 나의 정의일 것이다. (연애를) 하기로 한 이상 (연애하는 사람 사이) 해야 할 일들을 성실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안 하는 것. J는 교통사고처럼 피할 수 없이 덮치는 감정을 이야기했고 나는 스크린 속 미희의 대사가 나를 덮쳤을 때처럼 분했다. 내겐 (연애할 수 있는) 상황이 대강 마련되기 전에 감정이 문 부수고 들어온 경험이 없었다. 글쎄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열린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열림 교회 닫힘이었던 것일까.
결국 나는 <헤어질 결심>의 그 재료를 '목숨 바칠 만큼 불같은 사랑'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미결로 남고 싶은 미친 욕망'으로 해석했다. 송서래도 홍산오도 그랬다. 둘은 철저히 자기 욕망의 실현 수단으로 죽음을 택했다. 상대방을 붕괴시키고 싶은 파괴욕과 방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내 생각만 했으면 하는 독점욕. 그건 상대방을 사랑하는 걸까, 자기애일까? 아무래도 <헤어질 결심>은 순도 100%의 오타쿠 영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은 여전히 회색이고 호기심은 도로 미지근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친구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무지 궁금하다. 어떤 장면에 심장이 찌르르했고 어떤 장면에서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지. 하긴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것도 일종의 사랑인 걸까.
여담: 웃긴 피드백
1. J는 그때도 덕복이 이 주제에 금세 시들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2. 0은 덕복이 한 두어 달 뒤 별안간 이 주제로 급발진해 또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