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은 되도록 빨리 사 읽으려고 한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소설을 통해 처음 작품을 접했고, 구체적 묘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 소설 전반에 깔린 특정한 비판의식 등이 좋았다. 이후 <당선, 합격, 계급> <뤼미에르 피플> <한국이 싫어서> <재수사> 등을 읽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소설가라는 사실은 단행본 몇 권을 읽고 난 중간쯤에야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소설에 드러나는 사회적 메시지 등이 보다 선명히 읽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를 보면 작가 자신은 그런 메시지에 '천착'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모든 글은 내가 읽고자 하는 대로 읽힌다.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 앞에 곧잘 붙이는 '월급사실주의 소설가'라는 말이 좋았다. 소설가란 무릇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하는 고고한 존재라는 인식이 여전히 보편적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왠지 원고료 같은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고, 제 몸 하나 겨우 건사할 정도의 수준으로 먹고 입으면서 자신을 쥐어짜 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같은 편견에 당당히 반기를 든다. 떳떳하게 나서 원고료나 강의료 등을 협의할 수 있어야 하고, 부당한 처우에는 정당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큰 출판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위 '글빨 있고 이름깨나 날린다'는 작가가 문학계 한가운데서 이런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이는 비단 소설가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권위에 짓눌려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손에 쥐기 어려운 사람들이 무수히 다양한 업계에 존재한다. 소설가처럼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직종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또는 자주 일어난다. 소설가로서 작가는 "정당히 자신의 권리를 찾으라"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내야만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이상하지만, 이상하지만은 않은, 보편적인 직업이다.
그중 에세이의 백미는 신경숙 표절 사태 때 드러난 창비의 민낯에 대한 비판이었다. 아래 '0번' 글에 책에 나온 부분을 발췌해 기록해 두었으니 읽어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나무위키나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됐다.
0. 예비 작가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여러 플랫폼이 생기고 데뷔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작가와 예비 작가 사이의 회색 지대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입 기준을 높이면 그 자체로 차별과 배제의 도구가 된다. 기준을 낮추면 구성원들의 처지가 너무 다양해져 의견을 모으기 어렵다. 그렇게 밖으로 영향력을 잃고 안으로 감투 놀이가 유행하면 산악회나 다름없는 조직이 된다.
게다가 사람이 운영하는 단체는 인정에 휘둘리게 된다. 신경숙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는 끝내 아무 논평도 내지 않았다. A출판사가 SF 작가들에게 인세를 제때 주지 않은 데 대해 한국 과학소설작가연대는 내가 글을 쓰는 이 시각까지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두 단체 모두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대해서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경숙 작가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거둔 문학적 성취는 인정한다. 평소 필사하는 습관이 있다고 하니 착각으로, 실수로,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을 자기 것인 줄 알고 작품에 옮겼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 신 작가 의 사과가 썩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그를 둘러싼 비난이 과도하다는 생각도 했다.
문제는 당시 창비의 해명이었다. 창비는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으나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라고 주장했다. 요사스러운 용어들을 덜어내고 일상 언어로 다시 쓰자면 이런 얘기다. '문장은 정말이지 비슷한데 신 작가가 베끼는 모습을 네가 보지는 못했잖아, 천문학적인 확률로 우연히 이렇게 된 걸 수도 있지. 그러니까 표절이라고 할 순 없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어느 누구의 표절에 대해서도 표절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누구든 바로 그 천문학적인 확률을 주장하면 되니까. 글쓴이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사실상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다.
표절 여부를 가릴 때 우리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물로 판단한다.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두 글의 집필 과정이 아니라 닮은 정도만 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도저히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두 글이 유사할 때 우리는 나중에 쓰인 글을 표절이라고 판정한다.
음주운전 여부를 가릴 때에도 그렇다. 혈중 알코올 농도로 판단한다. 운전자가 “물인 줄 알고 마셨는데 그게 소주였나 보네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도, 음주운전은 음주 운전이다. 그런 때 "수치적으로 취기가 있다는 사실에는 합의할 수 있으나 의도적으로 술을 마시고 운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경기의 규칙이고, 창비는 그 규칙을 무너뜨리려 했다.
1. 그러니까 소설가한테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잘한다'는 평가는 조금 엇나간 칭찬인지는 몰라도 비난은 아닐 테다. 여기서 '그럴싸함'이라는 요소가 핵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철학자 해리 G. 프랭 크퍼트는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한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는 진실에 관심이 있으며 나름의 방법으로 그 진실을 존중하지만, 개소리쟁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나는 그런 관점을 소설 쓰기에도 적용해 본다.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쓰면, 정성스러운 거짓말이어야 할 소설이 그저 개소리가 되어버린다고. 그리고 소설에서 진실을 존중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사실성, 혹은 개연성, 핍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실제 작업 현장에서 나는 사실성이나 개연성, 핍진성을 어떻게 추구하는지에 따라 소설들을 분류한다.
2. 한데 어떻든 간에, 한국 독자가 한국 소설을 읽다가 '최고대학'이라든가, '삼송전자'라든가, '장미은행' 같은 고유명사를 접하면 아무리 진지한 대목이라도 헛웃음이 나기 마련이다. 소설은 있을 법한 거짓말이라는데, 그런 이름들을 듣는 순간 정신이 확든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삼송전자 대표가 장남을 장미 은행 행장의 딸과 결혼시키려는데 정작 그 아들은 최고대학 재 학 시절 교제했던 동기를 잊지 못해....... 어우 야, 도무지 몰입 할 수가 없다.
이게 일종의 착시일까? 해외 작가들도 가상의 고유명사를 많이 지어 쓰는데, 해외 독자들은 간혹 민망해하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것일까?
3. 고백하자면 그런 만남 자체가 좀 즐거웠다. 참석자들의 지성이나 선량함과 관계없이, 문학 출판계 인사들이 모이면 어쩔 수 없이 패배주의적인 분위기가 깃드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안 읽고, 우리가 뭘 해도 그런 추세는 바뀌지 않을 거야, 뭐 그런 신문기자들을 만나도 비슷한 공기다.
그러다 영화나 드라마 기획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씩씩함이 반갑다. 벌이고자 하는 모험의 규모도 크고 도전의 성격도 신선하다. "이거 제작비 건지려면 중국을 잡아야 해요"라든가 "한국에서 아무도 안 해본 장르니까 제가 해보려고요" 같은 말들을 스스럼 없이 한다.
4. 그래도 나는 이런 환경에서는 의뢰인이 먼저 가격 문제를 이야기하고, 가능하면 숫자도 먼저 제시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윤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의라고 생각한다. '얼마 주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은 얼마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게 꼭 위선과 엄숙주의 문화 탓은 아니다. 그 질문을 던지는 프리랜서는 자기의 시간이 곧 자기 자신이 흥정 대상임을 고백한다. 의뢰인은 그런 처지에 몰리지 않는다.
서글프게도 그런 손톱만 한 우위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강연료를 묻는 순간 연락이 끊기는 섭외자들이 꽤 많다. 공짜 강연을 바랐을 확률이 매우 높다. 강연장에 와서야 그 강연이 재능 기부 행사였음을 알게 됐다는 작가나 번역가도 있다. 끝까지 강연료를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입금된 금액을 보고 너무 소액이라 속앓이를 했다는 이는 부지기수.
5. 물론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자기를 소개한 방송작가도 있었 지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기분이 안좋고 속이 꼬인 상태로 "어느 방송국의 무슨 프로그램인데 요? A씨 연락처가 왜 필요하신 건데요?" 하고 되묻게 된다. 머릿 속에서는 이미 '안 됩니다'라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나를 소개해야 할 때 상대가 궁금 해할 만한 것을 먼저 한 번에 말하는 습관을 익혔다. "선생님, 지 금 혹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동아일보 사회부의 장강명 기자 라고 합니다. 00한 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회사 이름-부서-내 이름-용건 순서다. 상대가 궁금해할 사항의 순서이기도 하다.
그게 프로페셔널한 자기소개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 한다. 그런데 그런 자기소개를 반복하는 동안 그 문구가 서서히 나의 자기규정이 되어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