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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May 26. 2023

묻지마 범죄 당해도, 묻지 말라는 법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취재하면서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하고도 4일이 더 지났다. 그동안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뽑혀버린 나무처럼 표류했다. CCTV 영상 증거와 수사기록을 수집하고, 사건 관계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모아 담았는데 그 기록이 1600페이지가 넘는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사건 발생부터 검거, 경찰 수사, 검찰 송치, 기소, 1심 재판, 선고 등 진행 상황을 타임시트로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뒀다. 오롯이 그녀의 힘으로 해낸 일이다. 뿌리가 뽑혀 표류할지언정 나무는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다.


끔찍한 강력 범죄, 더군다나 이상동기범행(묻지마 범행)을 당한다면 이후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과학수사대가 출동해 현장의 모든 증거와 증언을 쓸어담고, 범인 잡는 일을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형사들이 일사천리로 사건을 해결해줄까. 그런 행운은 기대나 생각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돌려차기 피해 여성은 사건 초기 심각한 상해를 입고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의료진이 머리와 다리 등에 영구 장애가 예상된다고 할 정도로 손상이 컸다. 경찰이 그녀에게 성범죄 여부 등에 대해 물었지만, 눈을 뜨니 병실이었던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건 초기 '골든타임'이 흘러갔다. 경찰은 그녀의 속옷 밴드 부분에만 DNA 검사를 진행했고, 가해 남성의 DNA는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가해자의 휴대폰을 포렌식한 결과 "OO오피스텔강간" 등의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가 여럿 나왔으나 이후 성범죄와 관련한 추가적인 진전은 없었다. 상식적으로도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폭행해 정신을 잃게 한 뒤 사각지대로 끌고가 8분이나 있었던 상황은 성범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각지대에서 "구호활동을 했다"는 가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수사진행상황을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수사기관이 알아서 잘 조사해주겠지'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해자의 폭행 행위에 대해서만 '중상해' 혐의를 적용해 송치했고, 성범죄 여부는 1년이나 지난 지금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진위 여부가 다뤄지고 있다. 


많은 경우 피해자들은 수사 진행과정에서 소외된다. 기획보도 제목을 '제3자가 된 피해자'로 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검사와 피고인의 대립으로 이뤄진 현행 사법체계는 피해자를 참고인 정도로 취급한다. 피해자는 경찰이나 검찰의 어깨너머로 사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들의 물음에는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 주로 돌아오고,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가해자가 무슨 변명을 했는지, 현장에서는 어떤 증거들이 나왔는지, CCTV에는 어떤 모습이 찍혔는지 등 어쩌면 피해자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정보들도 공개 대상에서 제외된다.


돌려차기 사건의 오피스텔 현관 CCTV 영상은 지금은 유튜브나 뉴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용기를 내 공론화시키기 전까지는, 피해자에게 CCTV 영상 확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는 1심 첫 재판이 열리던 법정에서 이 영상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폭행을 당하면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이후 자신이 어떻게 맞았는지 또 어떻게 끌려갔는지 등을 사건 몇 개월이 지난 법정에서야 처음 보게 됐다.


그보다 황당했던 건 CCTV 영상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수사기록'이고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 등을 이유로 영상 파일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녀는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민사 소송을 걸어야만 했다. 민사 소송을 건다면 형사재판에 쓰이는 증거물들을 받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가해자로부터 금전적 손해배상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제기한 민사 소송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민사 소송을 통해 그녀의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민사 소송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원고와 피고가 있다보니 상대방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이름, 주민번호, 주소 같은 정보가 서류에 기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법률 사무소 이름으로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당시 그녀는 이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후 가해 남성의 구치소 동료라는 이는 그녀에게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가해 남성이 구치소에서 그녀의 주소와 이름 등을 수시로 웅얼거리면서 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출소하면 보복하겠다"며 그곳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전했다. 피해자는 또다시 '실체 없는 공포' 속에서 보복 범죄의 두려움에 떨어야만 한다. 


피고인에게 엄벌을 내려 '정의구현'을 하는 사법부만큼이나, 제3자로 소외된 피해자들을 보듬어줄 사법부도 필요하다. 피해자들은 아직도 '회복적 사법'으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피해자들이 무턱대고 가해자의 모든 신상정보를 캐내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한 사적복수나 온라인 신상공개, 마녀사냥 등 부작용도 적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가해자가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하고 있는지,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교도소에 수감된 '그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등이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 보복범죄로부터 나를 보호할 최소한의 수단인 것이다.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 여성은 "나처럼 범죄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고, 범죄가 일어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건은 물론 각종 강력 범죄 사건을 파헤치고 프로파일링을 공부하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그녀를 보면서 참 많은 걸 배운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다른 강력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피해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디어도 꿈도 많은 그녀다. 그녀가 힘차게 내딛는 발자국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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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묻지 마 범죄 당해도 가해자 묻지 말라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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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론회 나온 ‘돌려차기’ 피해자 “내 경험 살려 피해자 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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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담당자 재량에 맡긴 피해자 알 권리, 의무 통지 대상으로 법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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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고인 권리 보호하면서 피해자 권리는 알아서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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