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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Aug 18. 2022

46년 보살핀 딸을 살해한 어머니

재판 지켜보던 가족을 울린 판사의 한마디


법조 출입기자이다 보니 법원에 자주 드나들고, 공판 방청석에 앉아 기사를 쓰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러다보면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사건이 그랬다. 살인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치르는 사건이었다. 방청석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궁금증에 고개를 들어 피고인을 쳐다봤다.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사람까지 죽였을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피고인은 150cm 남짓한 키에, 제대로 서 있기나 할까 걱정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푸른 수의는 노인의 실제 신체 치수에 비해 족히 한 두 단위는 커 보였고, 얼굴에는 수감 생활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판사는 서 있기 힘들면 앉아서 선고를 들으라고 말했다. 텅 비어 있던 방청석에 그녀의 가족으로 보이는 듯한 남녀 3명 정도가 들어와 내 뒷줄에 앉았다.


아래는 항소심 선고를 정리해 당시 내가 썼던 기사다.



46년 돌본 장애자녀 살해한 노모…항소심 감형 이유는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딸을 46년간 보살피다 살해한 70대 노모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자녀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헌신했던 노모는 코로나19로 자녀와 24시간 집에 갇혀 지내며 우울증이 극심해졌고, 비극적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러한 노모의 마음을 헤아렸다.


부산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박종훈)는 살인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A(72) 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고 26일 밝혔다.


A 씨는 2020년 7월 자신의 집에서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딸 B(46) 씨를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주부인 A 씨는 지적장애 2급, 시각장애 4급 등 장애를 가진 B 씨를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 왔다. A 씨는 B 씨를 재활원이나 여러 모임에 데려 갔으나 잦은 돌발행동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5년 3월 일자리를 얻은 B 씨를 위해 A 씨는 함께 출퇴근을 하며 사회생활을 도왔다. 그러던 중 코로나19가 발생해 A 씨와 B 씨는 24시간을 집에서 함께 보내게 됐다.


A 씨 역시 2016년부터 우울증 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B 씨와 집에만 있으면서 그 증상은 더욱 악화됐다. A 씨는 가족들에게 “사는 것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던 시기에 B 씨가 A 씨에게 “죽자”는 말을 하자 A 씨는 B 씨를 살해했다.


1심 재판부는 “자녀가 장애를 가졌더라도 그 때문에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며 “피고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모두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며, 범행 외에 대안이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다른 이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행위는 엄중처벌이 마땅하나, 중증 지적장애 자녀를 오랫동안 돌본 피고인에게 여러 딱한 사정이 있다”며 “A 씨는 46년간 딸을 정성껏 보살피며 여느 부모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19로 자녀와 24시간 함께 지내며 우울증이 극도로 악화돼 합리적 판단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며 “범행 직후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하기 위해 우울증약과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었고, 가족들도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법정에서 재판부가 범행 사실과 양형 이유 등을 설명하자 A 씨와 방청석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안타까운 사건이어서 그랬지만, 이날은 선고 말미 판사의 한마디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당시 정확한 워딩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양형 이유까지 설명을 마친 판사는 할머니에게 "제 말 알아들으셨어요? 이제 집에 가셔도 됩니다. 가족 생각하시면서 그렇게 남은 인생 살아가세요"라는 내용으로 말을 건넸다.



선고기일에 선고를 끝낸 뒤 판사가 피고인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은 흔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특히 공판에서 판사가 이렇게 따뜻한 말을 건넨 것은 처음 봤다. 당연히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일부 판사들은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방청석에 있는 이들에게 조용히하라고 말하는 것만 주로 봐왔다. 심지어 살인 사건의 유족이 방청석에 앉아 검찰의 공소사실을 들으며 웅성인다는 이유로 '정숙'하라며 불호령을 내린 판사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칼에 수십차례 찔려 목숨을 잃었는데, 그 소상한 과정을 하나하나 들으며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판사들도 마스크를 써서 일부 목소리가 작은 판사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종종 피고인들도 자신이 무슨 선고를 받았는지 제대로 알아먹질 못해 되묻는 사례도 있었다. 법정 커뮤니티 위원회 등에 가면 매년 나오는 불평, 불만은 이런 류의 문제제기다.


이날 판사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에 내 뒷좌석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울먹이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퇴장하던 피고인도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법정에 기대하는 건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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