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가명·66) 씨의 죄는 가난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박 씨에 대해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노동력이 없는 탓으로 시내 유흥업소 다방 및 주점을 드나들며 껌팔이로 생계를 이어오며 용두산공원에서 노숙하는 것을 순찰 중인 경찰에 의해 단속돼 입소했다'고 적었다. 육군 소령으로 전역해 4명의 가족까지 둔 박 씨였지만 가족과는 '수취인 불명'이라는 이유로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박 씨는 입소한 지 4개월 만에 전신쇠약, 토혈, 식사거부 증세로 목숨을 잃었다.
사실 기획취재 전에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큰 역할을 했지만, 지역언론사를 중심으로 관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지는 일이 반복됐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형제복지원에 대한 나의 인식 역시 "안타까운, 그렇지만 잊혀져 가는 사건"이라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2018년 여름, 부산의 한 시민단체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126명의 신상기록카드를 입수하면서 본격적인 취재에 돌입했다. 피해자들의 진술에 의존했던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형제복지원 직원들이 수기로 적어내려간 신상기록카드의 내용은 우리가 매일매일 처리하는 보고서처럼 일상적이고 사무적이었다. 숱하게 오간 전입, 전출의 날짜를 일 단위로 칼같이 맞춰놓은 일부 문서는 때때로 정성스럽기까지 했다. 여느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지극히 사무적인 단어들이 오히려 잔혹스러움을 더했다.
형제복지원 신상기록카드. 연합뉴스
건장한 청년이었던 정장현(가명·33) 씨는 남구 용호동에 거주하는 처남을 찾아 부산에 왔다 집을 찾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던 중 전포파출소 경찰관의 눈에 띄었다. 길거리를 배회한다는 이유만으로 1984년 3월 17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정 씨는 입소 5개월 만에 전신마비와 고혈압으로 부산의료원에 입원했고, 열흘 만에 목숨을 잃고 만다. 입소 당시 정 씨의 신상기록카드에는 '건강(노동가능)'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건장한 30대 청년이 5개월 만에 전신마비와 고혈압으로 죽어나갔다.
김경학(가명·46) 씨는 1979년 8월 25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한다. 이름 대신 98-2628이라는 수형번호로 불렸던 그는 입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싸늘한 시신으로 형제복지원을 퇴소한다. 김 씨의 신상기록카드에는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한 것 같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형제복지원이 찍은 사진을 보면 김 씨는 혼자 서 있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런 40대 남성이 20일 만에 사망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형제복지원에는 매년 적어도 2000~3000명의 원생이 신규로 입소했다는 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섣불리 예측하긴 힘들지만, 피해자는 수 만 명에 이를 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신상기록카드는 '가해자' 집단인 형제복지원에 의해 쓰여졌으니, 여러 정황이 가해자의 입맛에 맞게 각색됐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
취재를 하다보면 당사자들의 기억과 진술이 서로 엇갈릴 때가 많다. 관련자가 많고 사건이 오래될수록 그런 경향이 짙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우리가 만났던 수십 명의 생존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당시 복무했던 경찰관과 공무원들의 기억과 진술이 하나 같았다는 점이다. 31년 전 그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았던 형제복지원이란 이름의 지옥은 규명돼야 할 실체적 진실로써 살아 숨쉬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학살에 가까운 인권유린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역시 징역 2년 6개월 정도의 형 밖에 받질 않았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12명에 달하는 사건이었는데도 말이다. 말년에는 종교에 심취해 목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던 박인근 원장은 하늘나라에서 구원을 받았을까, 그런 풀 방법이 없는 궁금증도 생긴다.
며칠 전 여야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근거가 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을 20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을 위한 절차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피해자들이 아직도 경찰관이나 공무원을 보면 이유 없이 '욱' 한다고 털어놨다.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낸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1명이 죽으면 '비극'이지만, 100명이 죽으면 '통계'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통계를 바라보는 정책이 아니라,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여러 글들을 짤막짤막하게 써볼까 합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봐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