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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자 Feb 25. 2023

표절이 허용되는 유일한 업계

'우라까이' 기자 또는 기사

"제 유튜브가 도둑질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못 참습니다."


유튜버 '리뷰엉이'의 '제 유튜브가 도둑질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못 참습니다' 영상 중 일부.


한 과학 전문 유튜버가 열흘 전쯤 올린 영상이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영상을 접했던 유튜버였다. '우주 끝까지 절대 갈 수 없는 이유'라던가 '1광년은 도대체 얼마나 먼 것일까? 직접 한 번 가보자' '지구와도 너무나도 닮은 이 행성' 등등 제목과 섬네일만 봤을 때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흥미로운 우주 과학을 소재로 다루는 유튜버였다. 상상력이 쉽게 쫓아가기 힘든 소재를 영화나 비유로 어르고 달래듯 설명해줘서 큰 감명을 받고는 했었다.


도둑질 당했다는 영상의 내용은 '특정 유튜버가 내 영상의 제목과 섬네일은 물론이고 스크립트, 영상 순서까지 정말 대놓고 베낀다'는 것. 심지어 그 도둑질을 한 유튜버는 자신의 행동을 사실상 인정하고, '효율적으로 남의 영상을 베끼는 법'에 대해 유료 강의까지 열고 있었다. 분노한 유튜버는 법적 대응 등을 예고했고, 댓글창에는 공분하는 다른 과학 유튜버들이 '나도 당했다'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원작자인 유튜버는 양자역학이나 블랙홀과 같은 주제로 영상을 만드는데 몇 달씩 걸렸다고 털어놨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이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저자 빌 브라이슨과 같은 세계적인 '과학 글쟁이'들도 초끈이론 등 골치 아픈 과학 이론을 글로써 풀어내기 어려워한다. 사실상 거의 포기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가 아닐까.


스마트폰을 손에 쥔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10분 내외의 영상으로 이 같은 이론을 설명해 내고야 마는 이런 유튜버들이 얼마나 공을 들일지는 짐작조차 어렵다. 하지만 영상을 베낀 이는 '스크립트와 영상, 섬네일까지 3시간 만에 끝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홍보했다. 말 그대로 정말 '빡칠 일'이고, 단순히 빡치는 것에서 끝내선 안될 일이다.




한국 기자들의 세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상 매일 벌어지는 풍경이다. 누군가 단독 기사를 쓰면, 특히 그 단독의 내용이 자극적인 것일수록, 뒤따르는 수십 개의 기사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우라까이'(뒤집다는 일본어 '우라가에시'에서 파생된 용어)라는 업계 용어에서 출발하는데, 그냥 베낀다는 걸 업계 용어처럼 써서 죄책감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시경 캡이나 고참급 기자들이 조간 신문이나 방송 메인 뉴스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면 통상 저연차 기자에게 '우라까이'부터 하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


픽사베이


우라까이에도 급(?)은 있다. 해당 출입처나 기관에 사실 확인을 하고, 기사를 나름 재해석,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이런 '1급 우라까이'는 그나마 업계 전반에서 이해를 해준다. 리드도 새로 달고, 기사의 순서도 바꾸고 나름 또 다른 관계자나 전문가의 멘트를 추가하기도 한다. "당신 매체의 단독 기사를 인정한다. 오늘은 졌으니 다음 단독을 기약하마" 뭐 대략 이런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냥 대놓고 복붙을 하는 경우다. 문단의 순서나 어미를 조금 바꾸면 그나마 양반이다. 간혹 오타까지 그대로 들고 가 베끼는 일도 있다. 리드 다음 문단에 '00일 ㅁㅁ업계에 따르면~'이라는 어구를 붙여 '우리도 취재한 거야'라는 구라를 보탠다. 이럴 때 업계는 법조계라던가 산업계처럼 무수하고 모호하다. 이럴 땐 제목도 더 자극적으로 단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배치해서 어떻게든 조회수를 뽑아내려고도 한다.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포털의 알고리즘에 의해 먼저 쓰인 단독 기사보다 상단에 배치되기도 한다.


단순히 스트레이트성 기사만 그렇냐. 그렇지도 않다. 2~3년 전에는 한 신문사 논설위원이 다른 언론사 기자의 칼럼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고 사표를 냈다. 보통 논설위원은 수십 년 간 기자 생활을 하고, 나름 편집국 내에서 '글빨 있다'는 고참 기자들이 가는 곳이다. 요즘엔 그런 수식어도 사라졌지만, 사설과 칼럼은 신문의 얼굴이라고도 했다. 참사 현장 르포를 베꼈다는 의혹을 받은 기자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얘기를 하면 '쟤 왜 저래?' '선수끼리 다 알면서'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너도 베끼고 나도 베끼고 우리 모두 아름답게 베끼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데 말이지. 문제제기 안하면 그냥 예전처럼 잘 굴러갈 텐데 왜 불편하게 관행을 들쑤시냐는 볼멘소리다. 이런 얘기를 하면 '너는 얼마나 단독을 많이 쓰길래 그런 소리를 하냐'는 말도 나올 테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단독 잘 못 씁니다. 그래도 내가 꼭 부자여야만 도둑질하지 말자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A 일보에 따르면, B 신문에 따르면 같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사실 요즘엔 기자들 간의 베끼기만 문제는 아니다. 실시간으로 네이트판이나 보배드림, 블라인드와 같은 인기 사이트의 하소연, 저격글 등이 문장 그대로 베껴져 포털 사이트 최상단에 게시된다. IP 추적을 통한 주거지 압수수색을 하지 않는 한 애초에 팩트 확인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글들이다. 오로지 조회 수를 위해 공장처럼 뽑아내는 기사들.


이 모든 이야기는 '한국 언론계 망했다. 탈출 말고는 답이 없다'며 기자들의 술자리 푸념으로 자주 등장하는 안주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단독 기사를 썼는데, 출입처에서 듣도 보도 못한 기자들이 고대로 베껴서 포털이나 SNS 메인 뉴스에 오르내리면 말 그대로 열불 난다. 유튜브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이런 게 다 건전한 생태계를 망치는 일이다. 유튜브와 달리 언론은 그렇지 않아도 무너져가는 악순환의 생태계인데... 그래서 이제는 다 함께 목소리를 좀 냈으면 좋겠다.


"기사 도둑질하지 맙시다. 이제 진짜 못 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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