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만큼 강한 자는 없다. 소년 만화의 불문 공식이다.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과연 그럴까 의구심이 드는 문장이기도 하다. 사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싸움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만화들은 말한다.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만큼 강한 자는 없다고. 그러니 이것을 조금 바꿔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면 너는 반드시 강해질 거야.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멸의 칼날의 기본 설정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정말 수많은 일본 만화를 보며 성장했지만 매번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일본 특유의 사무라이, 목베기, 그리고 소년병에 대한 로망이었다. 이전의 글에서도 가끔씩 지적했던 대로 일본은 세계 제2차 대전의 패망을 뼛속 깊이 새긴 국가고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에 의해 도시 하나가 전멸당한 경험이 있는 곳이다. 패전의 기억은 일본 사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중문화에 강한 영향을 미쳐왔다.
모든 일본 작품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수의 작품들이 '나약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정서를 공유한다. 물론 정의로운 주인공들은 이러한 무의식에 저항하지만 <나루토>든 <귀멸의 칼날>이든 각각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정서는 매우 유사한 색을 띄고 있다. 대부분의 빌런들이 약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고 흑화 되어 세계를 파괴하려 하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주인공들 역시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지 못했던 상처를 안고 산다. <은혼>이나 <바람의 검심>과 같은 작품들은 바로 구하기에 실패한 무사집단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특유의 이 유약함에 대한 깊은 혐오는 대체로 무결한 아이들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에서 패했던 역사적 경험은 기성세대의 죄책감과 콤플렉스를 건드렸고 이게 수동공격의 형식으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세대를 향해 오히려 가학적으로 표출되고는 했다. <배틀 로열>이랄지 <간츠> 그리고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모두 기성세대가 초래한 지옥 같은 재앙을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감당해 내도록 내몬다. 대체로 이러한 공식은 끔찍한 룰이 작동하고 있는 부조리한 세계 속으로 일군의 아이들을 몰아넣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이를 해결해 내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적절한 지도나 지휘 없이 상황 속에 방치되어 신체를 절단당하거나 살해당한다. 이 극단적인 비장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일종의 클리셰적인 미학으로 발현한다. 그러니까 목표를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불사르는 모습을 열정과 고귀한 희생으로 포장하는 기법이 바로 이 미학의 발현조건이다.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나 소년병들에 대한 낭만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도식으로부터 산뜻하게 비껴 나 있는 작품은 내가 알기로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가 유일하다. 일본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게게게의 수수께끼는 기성세대들이 자신의 업보를 아이들에게 미루지 않고 직접 짊어진다. 키타로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 세대인 미즈키와 일행들은 자신을 직접 희생하며 선조들의 원죄를 대속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 작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최근 일본이 내놓은 작품 중에 제일 좋았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한국 역시 갈수록 피해자성에 매몰되어 우리 안의 가해자성을 외면하는 작금의 현상을 떠올려볼 때, 자신 안의 가해자를 직시하는 용기를 지닌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 이런 맥락에서 <귀멸의 칼날>은 쉽게 시작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무라이, 목베기, 소년병이라는 기피 3요소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만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탄지로의 나이가 기껏해야 15세 정도라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인다. 도대체 애들한테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싶어 진다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귀멸의 칼날> 역시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긴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눈여겨볼만한 특이 지점들이 발견되고는 한다. 나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시선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단서들이 희미하게나마 숨어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는 구석이 있달까.
<귀멸의 칼날>은 오니들의 과거사가 (너무 자주 나와서 악명 높은) 회상 씬으로 소개되는 패턴을 지니고 있는데 대부분의 빌런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공격받고 모욕당하며 혈귀가 된다. 약한 것은 비천한 것이라는 혈귀들의 공통된 가치관은 사실 귀살대 주들에게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주들의 치열함은 바로 이 약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다만 그 지향점이 혈귀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들을 향해 발산되는 반면 주들은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결정적이고 매우 중요한 갈래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다는 것은 어찌 됐든 죄악이다. 약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것만큼 회한이 큰일이 없으니까. 약해서 형을, 동생을, 언니를, 부모를 잃었던 비참함은 주들이 강해 지기 위해 생명마저 단축시킴을 주저하지 않는 동력이다. 굳이 일본의 전국시대나 세계대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약자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냉혹할 수 있는 지를 잘 아는 나이가 된 독자들에게는 납득이 가능한 설명이 된다. 힘이 없으면 당한다. 권력이 없으면 당한다. 가난하면 당한다는 정서는 비단 일본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소년 만화는 극도의 강함을 지향하게 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해야만 한다. 아카자는 이러한 욕망의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다. 코쿠시보가 단순히 사무라이다운 극강을 향한 정진을 추구하는 캐릭터라면 아카자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무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하는 빌런이다. 소매치기를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약값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소년, 어린 나이에 죄의 표식을 양팔에 새겨야 했던 범법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번번이 따뜻한 세상 밖으로 밀려나간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일확천금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와 단 둘이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했기에 아버지를 잃고 난 후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자 망설이지 않는다. 처음 보는, 어딘지 이상한 아저씨를 따라가는 일은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아카자처럼 세상의 호의를 거의 느껴보지 못한 아이에게는 누군가를 믿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얻어터졌다고는 하지만 아카자는 생각보다 쉽게 케이조를 따라간다. 그의 무의식 속에는 어딘가에 기대고 싶다는 소년다운 열망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좋으니 이 외로운 세상에서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도장에 머물게 한다. 더욱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 여자아이는 지켜내지 못했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 코유키를 간호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아카자에게는 구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살려냄으로써 아버지를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귀멸의 칼날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대부분의 소년만화에서는 늘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묘사되지 않거나 생략되기 마련인 생활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탄지로 가족의 소소한 일상, 귀살대원들이 함께 생활하는 모습,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모습들이 꽤 자주 그려진다. 이 과정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은 친밀함을 쌓아가고 회복의 시간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격렬한 전투와 전투 사이 비로소 생을 살아간다. 아카자의 에피소드는 이러한 생활의 모습이 지닌 힘을 매우 강력하게 보여준다. 아픈 코유키 곁에서 이마에 올릴 물수건을 짜내고 옷을 갈아입혀주며 살뜰히 환자를 돌보는 하쿠지의 모습은 지극히 안정적이다. 수많은 돌봄 노동으로 단련된 정신과 신체는 냉혹한 세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무도인으로서의 정신과 신체와는 결이 다른 강함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가 아니었다면 아마 하쿠지는 무도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박한 아이이니만큼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 소소하게 살아갔겠지. 그러나 코유키 부녀가 제공해 주는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하쿠지의 무의식 속에서는 냉정하고 비열한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안 돼. 이미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하쿠지로서는 두려웠을 것이다. 어렵게 얻은 행복을 또다시 뺏길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는 강해지고자 한다.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코유키를 간병하는 틈틈이 무도를 연마하며 하쿠지는 강해진다. 점점 더. 그리고 그의 소박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또 다시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다.
두 번의 상실. 그것도 비참하기 그지없는 코유키 부녀의 최후를 목격하고 하쿠지는 가느다랗게 세상과 연결된 끈을 미련 없이 잘라버린다. 인간이길 포기하겠다. 세상이 내게 지옥을 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지옥이 되어주마. 그토록 강해지길 염원했으나 누구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하쿠지를 아카자로 만든다. 무잔에 의해 머리를 관통당해 혈귀의 피가 주입된, 다소 강압적인 방식의 혈귀화는 하쿠지의 기억에 혼동을 일으키고 정작 지켜야 할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아카자는 세상을 상대로 끊임없는 도전을 한다. 강한 자, 더 강한 자를 찾아내 대련하는 방식으로. 그에게도 나약함은 죄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을 향한 혐오였고.
알다시피 아카자의 최후는 소년 만화의 빌런다운 마무리였다. 무엇을 지켜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강함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지켜야 할 대상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탄지로와 기유에 비해 아자카의 강함은 방향을 잃은 나침반과 같아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이미 한참 전에 잊고 표류하는 난파선과도 같았다. 무엇을 위한 강함인가. 머리가 날아가도 끊임없이 움직이려 드는 아카자의 신체는 그 자체로 방향성을 잃은 폭력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기계적인 힘. 만일 코유키가 나타나 이제 충분하다며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아카자는 아마 다시 재생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었겠지.
그러나 아카자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는 이미 충분히 코유키를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작중 시대 설정으로 보면 <귀멸의 칼날> 속 세계는 매우 각박한 곳이었고 가난과 질병 앞에 사람의 목숨이 초개처럼 스러지는 시공간이었다. 다키 남매나 하쿠지는 물론이고 다른 상현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거나 축출당한 아웃사이더들이 비참한 생을 살아가다 모욕당하고 상처받아 자신과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혈귀가 되는 선택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코유키는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그녀 자신의 추측에 의하면 아버지 역시 포기한 병약한 아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런 그녀가 성년이 되도록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 역시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마 하쿠지가 없었다면 코유키의 수명은 어린 그 시절에 끝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유일하게 코유키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 하쿠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한과 죄책감의 발현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코쿠시보와 달리 아카자의 힘을 추구하는 욕망이 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하쿠지는 실로 다정한 사람이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수련도 제대로 못하고."
"상관없어요. 틈틈이 하고 있기도 하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하쿠지에게 미안해하는 코유키에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아마 이 대답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하쿠지는 코유키와 그녀의 아버지가 무사히 자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그가 코유키와 혼인을 약속하고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코쿠시보같은 순수 무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부수적인 것이었다. 소박한만큼 단순한 하쿠지에게 강함이란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쿠지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코유키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 왔다. 문제는 하쿠지가, 아자카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함을 추구하는 수많은 소년 만화를 보며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러니까 이 수많은 캐릭터들이 추구하는 강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 걸까?
행성을 파괴하는 카카로트, 원펀치로 적들을 날리는 사이마타, 혁명에는 실패했으나 소중한 일상만을 지키려 역날검을 든 켄신처럼, 혈귀나 프리더와 달리 누군가를 지키는 존재들인 히어로들이 폭력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아카자는 매우 독특한 대답을 전달해 주는 캐릭터다. 나는 아카자의 무예보다 하쿠지의 돌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강함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하쿠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최후의 순간에서조차도 이미 충분하다는 쿠유키에게 지속적으로 사과를 한다.) 하쿠지는 아버지를 잃었던 자신의 실패로부터 일어나 새로운 생명을 구원했다.
아카자가 (영원히) 착각하듯이 사람을 지키는 것은 무력이 아니다. 그의 다정함과 끈질긴 돌봄이야말로 사람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의 근본이다. 그가 아무리 수행을 했어도 코유키를 간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를 돌보느라 수행이 더디더라도 간병이야말로 진짜 사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코유키는 이미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쿠지에게 전하려고 했었다.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는 하쿠지의 말에 여기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아버지를 통해 하쿠지에게 혼담을 넣고서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부들부들 떨던 이 작은 소녀는 하쿠지의 대답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웃음을 짓는다. 자신을 구원하고 지켜낸 사람에 대한 열렬한 감사와 애정을 지니고. 연인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일생일대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미 나를 충분히 지켜냈다고.
당연하게도 싸움이 주가 되는 액션 만화에서 상당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나는(로맨스 싫어하는 인간인데도) 하쿠지와 코유키의 수많은 시간들을 상상했다.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함께 동네를 거닐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수련보다 더 코유키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겼을 하쿠지를. 독자들에게조차 보여주기 아까울 정도로 반짝일 그 모든 유약한 시간들을 말이다. 그러니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코유키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은 아카자의 착각일 뿐이라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유키가 병상에서 일어나고 용기를 끌어내 사랑을 고백하기까지의 시간들은 분명 하쿠지가 지켜낸 것이었으니까.
신사의 개는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괴수가 아니라 그 장소에 머물며 곁을 지키는 존재다. 석상처럼 변함없이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코마이누의 진짜 역할이다. 그러니 하쿠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코유키를 지켜내 왔다. 아주 예전에 끝이었을 그녀의 생명을 조금씩 조금씩 연장해 가면서 코유키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생을 지켜내 왔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코유키는 하쿠지를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향한다. 문제는 어리석은 하쿠지만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를 거라는 거다. 아자카의 마지막 순간 코유키를 만난 하쿠지는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오열한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을 코유키는 안쓰럽게 안아준다. 그러니까 이미 이야기해 줬잖아요. 충분했다고. 당신이 지켜준 덕분에 나는 길을 걷고 불꽃놀이를 보고 사랑을 했다고. 그러니까 이미 충분하다고.
긴 시간 동안 방향을 잃고 사람을 살육하러 다녔던, 극단적으로 강함을 추구했던 아카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코유키는 다시 한번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말을 다시 건넬 수 있는 순간이 도래했을 때 코유키는 하쿠지가 이해를 하든 하지 못하든 다시 한번 마음을 전한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나를 구해냈어요. 나를 지켜줬어요. 지켜야 할 대상이 있던 당신은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어요. 아카자가 아니라 하쿠지로서요. 언제쯤 이걸 이해할래요. 그러니 내가 지옥으로 따라가야겠어요. 곁에서 영원히 말해줄게요. 당신이 진짜 강함의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우리에게 이제 시간은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