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첫째 되는 계명

마태복음 22:37-22:40 묵상

by 김재광

(이 글은 오늘 수요 기도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묵상입니다. )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 저는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던진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바탕으로 여러분과 함께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아무 명쾌한 답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이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뭐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건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하는 것이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개념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직접 말씀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요? 교회에서 흔히 하는 대답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니 성경에 나온 가르침에 순종하고 실천하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더 곰곰히 생각해 보면 두가지 정도 문제점에 봉착합니다. 첫번째는 말씀 순종이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결과인 것이지 그것 자체는 하나님 사랑과는 좀 구별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랑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랑 다를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부모님께 순종할수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말씀에 외형적으로 순종하는게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유형이 당시의 바리새인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문제점은 하나님 말씀 순종이라는 것이 현실 문제에서는 문자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어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는 분명 어려움이 있기에 "하나님 사랑 = 말씀 순종"이라는 대답은 그리 신통치 않은 대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을 찾아보고자 하는데요, 그 실마리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찾아보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착각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매일 뜨겁게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알고보니 그가 찾은 하나님은 자신의 상상 속의 하나님이라고 합시다. 그 상상속의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고 요술 램프에 있는 지니처럼 그 사람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라고만 그 사람이 이해하고 있다면 과연 이를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착각에 기반해서 저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다고 해 봅시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걸 마냥 즐기고 기뻐해야 할까요? 아마도 제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걸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본인이 착각해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뒤끝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좀 미지근하더라도 제 장점과 단점을 제대로 알고 그런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제를 하는게 더 오래가고 더 단단한 관계를 맺을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빌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전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이해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가 허상과 오해에 기반한 것이 아닌 사실과 상호 이해에 기반한 것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공허한 구호이고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차원이 훨씬 높으신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절망이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절망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게 은혜인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3:18)에서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종의 차원과 이해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더 많이 순종하면 더 많이 사랑한다는 증거일 것이고, 더 많이 이해하면 그것 역시 더 사랑한다는 것으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요? 뭔가 하나가 더 빠진것은 없나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저는 또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때 그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얼 의미합니까? 물론 여기에서도 순종의 차원도 있고 이해의 차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빠진게 있는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닌 이상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와 그 상대는 서로의 소통채널이 키워지고 그러면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를 나누게 됩니다. 그건 바로 그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가 갖는 감정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쉽게 판단합니다. 판단을 하는게 사실은 상대를 대상화하고 마음의 벽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오래 참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통해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고 나의 자아가 상대를 품을만큼 확장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내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의미하므로 나의 자아가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고 상대를 품는 것이니 그것은 나의 boundary 가 확장되는 것, 즉 성장과 성숙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다양한 층위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다양한 층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철부지 사랑도 있을수 있고, 또 청년의 뜨거운 사랑도 있을수 있고, 중년의 성숙한 사랑도 있을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을 해도 하나님은 만나주시지만 계속 거기에 머물러있으면 엄밀하게는 그 사랑에 충실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호관계를 통한 변화와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기에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은 내게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을 이끌어 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이해와 성숙을 통한 자아의 확장이라는 개념이 들어갑니다. (물론 그 성숙의 과정에 고통이 따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고난을 경험하는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 상호작용으로 인해 성숙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는 어린아이처럼 이것주세요 저것주세요 이렇게 간구하는 대상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던가, 아니면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내리는 무서운 존재로써 하나님을 이해하는 단편적인 방식에서 벋어나 이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가 변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시야가 일방적이고 단편적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전에는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기 보다는 적당히 포장해서 편하게 이해해 왔었는데 이제는 그런 거짓을 버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이해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통해서 나는 온전히 단독자로서 나의 고유함과 나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세울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세운다는 말은 내 자아와 화해를 이룬다는 말과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내가 세속적으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자각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강을 얻을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을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얻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또는 하나님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할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이해 능력은 결국 성장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오직 인간이 가질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지만 아무나 갖지 못합니다. 그 성장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절대자와의 관계이므로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과 화해를 이루어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도울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도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으로 다시 만나주시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으로 다시 만나주십니다. 남들이 말하는 하나님에서 내가 만나는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의 하나님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개별적인 만남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남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섬길수 밖에 없게 되고 그러면 율법주의자로 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개별적(인격적)으로 만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의 자아가 확장되고 하나님 앞에서 평강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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