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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Mar 23. 2022

길 위에서 죽고 싶다


  한낮 작렬하던 태양의 귀갓길이다. 수평선이 붉은 불길에 휩싸인다. 벤치 위 어깨를 나란히 한 이들 위로 노을이 쏟아진다. 바다색도 노년의 새하얀 머리칼도 붉은 노을과 동색으로 잠긴다. 홀로 우뚝 선 소나무가 파수꾼처럼 그들 옆을 지킨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한 드라마다. 불혹을 넘은 여배우가 출연자 중 막둥이란다. 국내 최고 여배우도 노년의 배우들 앞에선 그저 살가운 손녀만 같다. 그녀의 애교에 노배우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도 큰 뉴스이다. 앞으로 함께할 기회가 더는 없을 것 같아 참여를 주저치 않았단다. 드라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자극적 요소 하나 없이 세련된 감성과 인간애를 담은 드라마가 나의 감성을 깨운다. 

  “길 위에서 죽고 싶다.”

  한 친구가 피를 토하듯 쏟아낸다. 은퇴 후엔 세계여행 가자는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의 생을 아낌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친구다. 노년이 되어도 가족들은 그녀의 희생만을 강요한다. 더는 참을 수 없는 그녀가 자신을 옭매던 일상에서 탈출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그녀의 친구들이 동행하나 여행길은 순탄하지 않다.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져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 쏟아지는 폭우에 발이 묶여 시골 허름한 숙소를 찾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조급함은 없다. 오히려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죽음에 관한 물꼬를 튼 건 아마도 빗소리 탓이리라.

  죽는다면 어떻게 죽고 싶으냐는 친구의 질문에 객사는 싫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여행 안내서를 주섬주섬 펼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미 두려움은 사라진 듯 하다. 특별한 위로가 없어도 고달픈 삶과 병든 육신이 서로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노년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진짜 모습과 마주할 용기를 낸 그들이다. ‘우리는 아직 청춘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그들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귓가를 맴돈다.

  친구는 어느새 머리가 하얀 노인이다. 우아한 여배우 친구도 화려한 겉모습관 달리 외롭고 슬퍼 보인다.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그들은 여행을 이어간다. 점점 그들은 서로의 고민과 아픔을 외로움과 슬픔을 위로하며 길을 걷는다. 머지않아 떠나게 될 죽음마저 마지막 여행이라 말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금은 일찍 찾아온 병마가 야속하고 억울하기도 하련만, 그들의 여행길은 더없이 평화롭다. 

  삶의 마지막 여행길을 준비하는 마음을 조심스레 들여다본다. 세월이 흘러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익숙한 삶을 이별할 때가 온다. 그날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뜻밖의 경우로 준비 없이 떠날 수도 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초행길인 건 분명하다. 낯선 세계가 두려운 반면 궁금증이 인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가 애초에 떠나 온 본향일지도 모른다. 나는 부모님에 이어 형부가 불현듯 떠났다. 그런 탓일까. 죽음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다. 문득, 초상집 풍경이 떠오른다. 집안에 누군가가 생을 달리하면 상주는 사자 밥을 먼저 준비한다. 밥과 나물과 고무신을 준비해 대문 밖에 작은 상을 차린다. 영혼을 배웅하러 온 저승사자를 대접하는 것이란다. 망인을 부디 편안하게 모셔주기를 바라는 우리네 마음이 담긴 풍습이다.

  유년 시절 작은 상에 소꿉놀이하듯 꾸며진 잿밥에 호기심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처음으로 본 것 같다. 대문 앞에 쪼그려 코를 박고 구경하고 있자니 이웃 아저씨가 그곳에 있으면, 시커먼 옷 입은 저승사자가 잡아간다고 겁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에 울며 엄마에게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였지만 잡아간다는 말에 무서움이 일었던 듯하다.

  정녕 저승사자는 무서운 존재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온통 검은색이다. 눈과 입술마저 시커멓게 화장하고 검은 옷과 갓을 써 인상은 차갑기만 하다. 하지만, 나만의 상상 속 그들 모습은 좀 다르다. 고단했던 이생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귀환하는 망자를 맞는 이가 그리 험악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동안 수고했다.’라며 등을 토닥여 위로하지 않을까. 이승의 마지막 강을 건널 즈음엔 친절히 저승 세상도 설명해주리라. 멋진 춤과 구성진 목소리로 망자를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이승을 떠나는 여행길에 마지막 동반자임이 분명하리라. 

 여행은 인생의 징검다리이다. 생업에 지친 우리의 삶에 낯선 세상을 구경할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다. 여행지에선 동행자와 평소 주고받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눈다. 때로는 오해로 깊어진 앙금을 풀어주어 불편했던 마음도 말끔히 털어낸다. 여행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도 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것, 언젠가는 마지막 여행길을 떠나야 하리라. 

  인생길은 유한한 길, 어느 즘에서 멈춰야 하는 예고된 길이 아닌가. 이 과정을 고단한 몸을 쉬고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기면, 두렵지도 무서울 일도 아니다. 그 여행길을 선택하라면 나 또한 기꺼이 ‘길 위에서 죽고 싶다.’라고 하리라.

  벤치에 나란히 앉은 그들의 볼이 발그레하다. 붉은 노을빛이 주름도 가려주니 소녀같이 고운 모습이다. ‘마지막 여행길이 좀 더 멀었으면, 길 위를 달리는 노년의 여행이 더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내레이션이 흐르며 붉은 바다가 서서히 침잠한다.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의 복받침에 눈물이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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