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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Mar 23. 2022

몸의 기억

  쥐 떼다. 느닷없는 쥐의 무리에 혼비백산 줄행랑친다. 분명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리라. 하지만, 옷자락이라도 물린 양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친다. 박물관의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진 탓에 출구도 찾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입구를 찾아 기를 쓰고 헤매다 마주한 곳이 다시 쥐 떼 앞이다. 무엇에 홀린 양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 마음을 진정하고 안내원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뿔싸, 쥐 무리를 지나야 출구가 나온단다.

  놈이 문지기이다. 쥐의 형상에 놀라 출구 표식을 못 보고 지나친 것이다. 난 평소 겁이 없는 편이나 쥐만은 예외이다. 놈을 지칭하는 단어만 떠올려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인들과 세계무역박람회를 관람코자 방문했건만, 쥐의 형상에 놀라 좌불안석이다. 쥐의 무리를 벗어나고자 헤맨 탓에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쓰러질 것만 같다. 몸의 기억인 걸까. 오래전 일인데 마치 어제의 일인 양 선명한 장면이 있다.

  유년 시절 할머니 방에서 종종 잠이 들었다. 그날은 사촌이 찾아와 함께 잠을 자던 중이었다. 잠결에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할머니가 시커먼 짐승과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순간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녀석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결투는 할머니의 승리로 끝났고, 할머니와 사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잠들었다. 하지만, 난 그 눈빛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밤을 새운 기억이 또렷하다. 돌아보니 덩치 큰 검은 짐승은 쥐였다. 놈이 무리에서 떨어져 음식을 찾아 잘못 들었던 길이었으리라.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쥐란 단어만 들어도 몸이 움츠러든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 걸 한참 후에야 알았으나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피하지 말자’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보지만, 몸의 기억은 마음보다 앞선다. 삼십 년 이상 ‘심리적 충격’에 관해 연구했다는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말을 새겨 본다. ‘자기 몸의 감각에 익숙해지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회복 될 수 없다. 깜짝 놀란 상태로 산다는 건 늘 경계 태세에 있는 몸으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한다.’라고 한다. 스스로 몸의 감각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일까. 내 몸이 기억하는 순간을 피하는 것이 아닌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몸과 마음의 기억은 하나이리라. 한때 생업을 제외하곤 모든 만남을 거부하였다. 친구도 지인도 심지어 가족까지도 거리를 두었다. 홀로 두 아이와 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고 위로로 건네는 말인 줄 왜 모르랴. 하지만, 악의 없는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움츠러드니 야속한 일이었다. 사람을 피하는 방법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 여기고 생업에만 몰두했다. 눈을 뜨면 일터로 향하고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했다. 몸은 세상과 담을 싸고 지내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 벌어졌다. 새로 들여온 기계가 몸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여러 사람의 가슴을 쓸어내린 사고가 일순간 내 생각을 일깨워 주었다. 세상과 쌓았던 담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사람을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깨우침에 친구들과 만남도 피하지 않았다. 그즈음 인연을 맺은 수필도 나를 조심스레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 수필은 감추고 묻어두고자 애썼던 음지의 기억을 소환해 치료까지 해주니 명의 중 명의이다. 웃는 모습이 이쁘다는 소리도 다시 듣기 시작했다. 

  몸은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기억한다. 때론 왜곡된 기억도 품고 있으리라. 몸의 기억에 주의를 기울이고 감각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은 그 때문이리라. 또한, 부끄럽다는 마음은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고 싶은 심리일 수 있다. 그런 탓에 상처를 받고 통증도 느끼는 것이리라. 그 마음을 질타만 해야 할까. 몸이 기억하는 모습을 세심히 살피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충격으로 인한 몸의 기억을 외면한다면, 매 순간 살벌한 경계 태세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찌 세상을 그리만 살 수 있으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쥐의 형상과 마주한다. 가슴이 다시 방망이질 친다. 하지만, 두 손을 꼭 쥐고 녀석의 눈을 찬찬히 마주 본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움찔 요동친다. 그런데 그 눈빛이 아니질 않은가. 어두운 밤 나를 쏘아보던 살기 가득한 눈빛과 사뭇 다르다. 그제야 심호흡하며 찬찬히 녀석들을 돌아본다.

  작가는 나와 같이 쥐에 대한 공포를 겪은 사람이 아닐까. 그것을 벗어나고자 작품의 소재로 쥐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작품에 상상을 더해 돌아보니 쥐는 보이지 않고 작가에 대한 호기심만 커진다. 드디어 몸이 기억하는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다.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유유히 출구를 빠져나온다. “쥐란 녀석, 이제 네가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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