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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k DEE Apr 05. 2024

세탁기 속의 비밀 문명

양말이 사라지는 진짜 이유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생활의 반복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세계로의 문이 열리는 소리다.



어느날 양말 한 켤레가 또다시 사라졌다.

분명히 두 짝을 함께 넣었는데, 돌아온 것은 외톨이 양말 한 짝뿐. 아무리 찾아도 없다.

사람들은 이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대충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갸우뚱하고 말겠지만

나는 양말이 단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몇일 뒤 세탁날, 또 어김없이 양말 한짝이 사라지자 곧바로 세탁기 뒤편으로 몸을 숙여 비밀스러운 문을 찾아보았다.

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양말은 세탁기의 틈새를 통해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 양말들만의 문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양말들은 자신들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논하며, 어떤 양말은 후회하고 땅을치며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또 다른 양말은 영원히 이 곳에서 머물거라 다짐하며 어리숙한 양말들을 선동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양말에 대해 한탄할 때마다, 신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과거를 생각하며 복수감에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에게 묘한 위안을 준다. 양말이 사라지는 것이 그저 시덥잖은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큰 이야기로의 상상으로 펼쳐진다는 것이 아직 내 안에 꼬마 몽상가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양말들은 내가 어른이 되며 잊고 지내던 모험과 상상력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몇일 뒤, 세탁기를 돌리는 날.

나는 세탁기 통속으로 들어가는 양말에게 속삭였다.

"잘 가라, 용감한 탐험가여. 너의 모험이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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