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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Mar 09. 2024

런던에서 본 "리어왕"

나의 영국에서의 첫 연극이 셰익스피어라니!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보스에게서 메일이 와있었다. 

"내가 원래 오늘 저녁에 남편이랑 함께 연극 리어왕을 보려고 표를 끊어놨는데, 남편이 셰익스피어라면 너무 지겹고 싫대. 누구랑 같이 갈지 생각해보다가 네가 생각났어(일전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대화를 한시간 가까이 나눈적이 있음). 혹시 오늘 시간이 되면 같이 갈래?" 


와, 이런 엄청나게 감사한 제안이라니!! 보스 사부님, 셰익스피어를 싫어해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혹시라도 보스의 마음이 그사이 바뀔까봐 불안해하며 얼른 답장을 보냈다. 

"난 너무나도 당연히 그리고 감사히 같이 갈거야!"라고. 

정말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사실 월요일에 나는 아직까지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서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전날 새벽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출근했고, DC에 다녀온 후 제대로 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하다고 어떻게 셰익스피어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재밌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캐릭터(리어왕)가 등장하는 연극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그렇게도 짜증나는 인간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실 리어왕을 어린 시절 처음 읽었을 때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제대로 읽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셰익스피어 수업을 담당한 교수님은 캐나다에서 셰익스피어를 전공하고 오신 분이었는데 수업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문을 잠그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도 한번 9시 수업인데 9시 1분 다되어 갔다가 문이 잠겨서 결국 수업은 결석처리 되고(학점에서 감점) 강의실 옆 복도 계단에 쭈그려 앉아 서러운 마음에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뭐, 내가 늦은거니 할말이 없었다(다만 이 사건은 내가 꼭 돈 벌어서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에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교수님의 수업은 회계학 수업보다 더 자주 퀴즈를 봐서(거의 매시간) 영문과에서 유독 어려운 수업으로 통했고, 학점에 목을 매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피하는 수업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수업은 다른 수업보다 훨씬 더 어려우면서도 너무너무 재밌었다. 대사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주시고 또 연기까지 해가며 캐릭터 분석까지 해주셔서 작품들의 진짜 의미에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나는 교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처음으로 문학 작품에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갑자기 생각하니 15년만에 교수님께 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어진다. 아마도 나를 기억 못하실 것 같아 참아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셰익스피어인데, 영국에 와서 리어왕을 첫 연극으로 보게되다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업무시간이 끝나자마자 보스를 기다려서 함께 연극을 보러갔다. 이슬링턴에 있는 알메이다 극장이라는 곳이었는데, 1980년에 오픈한 극장으로, 몇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런던의 다른 극장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최근 만들어진 극장에 속한다는 보스의 설명을 들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이 크지 않아서 앞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잘 보였다. 월요일 저녁인데도 빈자리 하나 없이 모든 객석이 빼곡히 차있었다. 


당연히 (리어왕이니까) 옛날 옷을 입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어왕이 첫 등장부터 양복을 입고 등장해서 매우 당황했다. 게다가 리어왕이 등장하자마자 "내가 오델로를 보러 온거였나?"하고 아주 잠시 생각을 했다. 그제서야 조금 현대화시킨 연극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다보니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금방 연극에 빠져들 수 있었다. 


연극 리어왕에서 리어왕 역할을 맡은 배우 "대니 사파니"


다만, 갑자기 가게 된 것이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워낙 고어로 어렵게 쓰여 있는 탓에 대사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미리 한번 읽어보고 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내용을 모두 알고 있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정말 좋은 연극이어서 좀 더 제대로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아쉬움이 있었다. 


리어왕이 갑자기 고어물로 변하는, 글로스터 백작의 눈을 뽑는 장면은 너무 잔인하게 묘사가 되어서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콘월 공작이 두번째 눈을 뽑을때 입으로 눈을 뽑아서 바닥에 뱉어버렸는데,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모습이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서 가짜인걸 알면서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보스도 여지껏 리어왕을 여러번 보아왔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묘사된 리어왕은 처음이라고 했다. 


음향도 그렇고, 조명이나 의상까지 작은 극장인데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잘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특수장치들은 심지어 작년에 한국에서 보러갔던 어느 오페라 공연보다도 훨씬 더 잘 되어 있어서 역시 영국은 다른건가 싶기도 했다(해당 공연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다만, 요즘 예술계 예산이 많이 깎여서 의상이나 특수효과 묘사가 조금 어려워졌다고 들었다).


예전에 리어왕을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을 안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워낙 코딜리아를 맡은 배우가 반항적으로 연기를 해서인지, 코딜리아는 대체 왜 그렇게 융통성 없이 입바른 말만 해서 리어왕의 미움을 샀을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실제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그 마음을 예쁘게 표현한다고 해서 어디 잘못되는 것도 아닌데 자기는 언니들과 다르게 아첨하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그 모든 사단이 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코딜리아가 가장 아버지를 닮은 딸인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보스와 이런 감상들을 주고받으며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문학 작품이 주는 즐거움을 실로 오랜만에 다시 느껴본다. 그날 집에 와서 오더블에서 리어왕과 조지오웰의 1984를 찾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영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해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나의 해외 경험이라곤 몇년전 타이완에 3일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고, 미국변호사시험과 5일간의 출장을 빼면 나는 늘 서울 아니면 경기도에 붙박이처럼 있었다. 내가 자꾸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래서 내 마음속에 엄청난 한(?)이 맺혔고 그동안 해외에 올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해외, 그것도 영미권으로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문화에 정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열망 내지 열병은 내가 기억하기로 아홉살 때 엄마가 내게 "제인 에어"라는 책을 사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샬롯 브론테 이후로 쭉 한국문학보다는 영미문학을 더 많이 읽었고, 급기야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때는 연합고사 준비는 안하고 방학 내내 50권 가까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Five라는 가수의 팬인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가요보다는 팝송을 더 많이 듣기 시작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열성팬이 되자 할리우드 가십 기사를 챙겨보게 되었고, 그런 관심은 할리우드 영화, TV쇼까지 점점 확장되어 나중엔 할리우드 스타들의 연애 관계도까지 그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런 관심 때문에 대학교 원서를 쓸 때 오로지 "영문과"만 고집했었다. 그리고 영문과에 가서도 "영어학" 수업에서는 처음에 고전을 좀 했지만, "영문학" 수업들 만큼은 너무 재밌어서 어떤 수업들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빼면 수업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영문학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솔직히 교수가 되는게 아닌 이상 영문학은 굶어죽기 딱 좋은 학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3학년 때부터는 경영학을 복수전공했고, 이후에는 영문학과 멀어지려고 많이 애를 썼었다. 


이후로 나는 뭣도 모르고 영문학 전공을 진로로 택했다며 한탄하곤 했었다. 여지껏 살면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영어강사를 할 때 빼곤 도움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에 와서 영문학, 영미 문화에 대한 그 쓸데없어 보였던 관심들이 이곳의 문화를 즐기고, 또 사람들과 알아가고 친해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시니어 직원들과는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영문학 얘기를 하면서 좀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새삼 인생에서 정말 쓸모없는 건 없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팀원 중 왕좌의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처음 대화를 할 때 "너 왕좌의 게임 봤어?"라고 하길래 "두시즌을 봐도 겨울이 절대 안와서 그냥 때려쳤어"라고 했더니 빵 터지더니 방금 그 라인(The winter never came)을 다음에 자기도 꼭 써먹겠다고 했다. 보통 한국에선 내가 다른 사람을 웃기는 법이 없는 아주 지루한 사람인데 여기서는 누군가를 웃기기도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남은 런던 생활 동안, 주말에 기회가 될 때마다 공연을 보러다닐 계획이다. 영국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감사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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