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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Mar 23. 2024

런던에서 본 "오페라의 유령" 후기

20년만에 소원성취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항상 좋아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책도 많이 보고, 영화도 많이보고, 드라마도 많이 보고, 미국드라마도 정말 많이 봤다. 대학교 때부터는 오페라, 뮤지컬까지 좋아하게 되었는데 재작년 겨울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리골레토를 보기 전까지 비싼 티켓값을 감당할 수 없어 오페라나 뮤지컬을 실제로 보러간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영화 매치포인트의 주인공이 영화속에서 나와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했었는데, 무척이나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온갖 문화적 향연의 기회가 넘쳐나는 런던에 있다. 계속 사무실과 집만 왔다갔다 하다보니, 갑자기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충동적으로 todayfix* 를 켰고, 어떤 공연을 볼지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오페라의 유령'의 표가 조금 싸게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을 예매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오페라의 유령'은 내가 좋아하는 넘버가 가장 많은 작품이다. "Think of me", "Masquerade", "All I ask of you" 등등 정말이지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보니 영화와 유튜브로 수없이 듣고 들었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보러갈까, 한국에 돌아가면 찾아 보기 쉽지 않을것 같다는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F열인데도 티켓이 그리 비싸지 않게 나오기도 했어서, 바로 결제까지 진행해버렸다. 

 

저녁시간 트라팔가 광장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를 지나 공연 시작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이 줄을 서있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기도 해서, 직원에게 언제부터 입장이 가능하냐고 했더니, 10분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 10분동안 열심히 His Majesty's Theatre의 사진을 찍었다(나의 사진 찍는 실력은 도무지 늘지를 않는다). 


공연 시작 시간보다 1시간도 더 남았지만 이미 줄 서있는 사람들


공연 시작은 7시 30분. 드디어 6시반부터 입장이 시작되었다. 극장 안으로 먼저 입장한 후에도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퇴근하고 급히 왔던터라 목이 말라서 기다리는 동안 물을 샀다. 그런데 500ml 짜리 물 하나가 무려 4파운드나 되었다. 스파클링 워터도 아니고 그냥 물(still water)인데 이 가격이다. 극장측의 말도 안되는 상술에 눈물이 났지만, 그래도 공연 내내 목이 타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500ml 짜리 한병에 4파운드나 하는 물


4파운드에 결제한 물 때문에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있자니 공연장 안으로 입장이 시작되었다. 내 자리는 Stall, F열 정 가운데 자리로, 직접 앉아보니 꽤 좋은 자리다. 다만, 시력이 더 안좋아진건지 안경을 끼고도 배우들 얼굴이 잘 안보여서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더 앞자리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극장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차기 시작했다. 


공연 시작 전, 극장 내부 모습


신기하게도 공연 시작 시간인 7시 30분에서 8분 가량 더 늦게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그 사이에도 사람들이 계속 새로 들어와서, 중간 자리로 가는 사람이 한명 있을 때마다 해당 열에서 열명쯤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소동이 반복되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모습


도대체 공연은 언제 시작하나, 슬슬 불만이 터져나오려 할때쯤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에미로섬의 크리스틴이 내 뇌리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일까, 첫 등장부터 크리스틴 역을 맡은 배우의 노래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카를로타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음색이나 성량이 훨씬 좋아서, 도대체 왜 팬텀이 카를로타를 제치고 크리스틴을 주인공으로 세우라고 하는건지 이해가 안될 정도였다.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그래서 초반부터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보게 되었는데, 크리스틴 배우의 목소리가 잠시 갈라지기도 했다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나아지는 것을 보니 추측건대 그날 목상태가 좀 안좋았었던것 같다.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그리고 대망의 팬텀 등장...! 팬텀의 등장과 함께 모든 번뇌가 사라져 버렸다. 팬텀의 음색과 성량은 정말 엄청났다. 실제로 이런 목소리를 들을수가 있다니, 팬텀이 나올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작품이 마지막으로 치닫아갈때쯤 내가 제일 좋아하는 Masquerade 가 나왔다. 의상, 무대, 노래,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아.. 내가 이런걸 정말 눈앞에서 실제로 볼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감격이 갑자기 확 올라와서 눈물이 났다. 화려하게 꽉찬 무대를 보면서 너무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그리고 마지막 팬텀의 최후. 처음 볼 때나, 지금이나 항상 팬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태어나 단 한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팬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던 팬텀. 그리고 크리스틴의 키스 한번에 크리스틴을 놓아줄 때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받아들인 팬텀. 팬텀이 살아왔던 외롭고 고되었을 삶, 그리고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해서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진 출처: https://lwtheatres.co.uk/


그날밤 집에 돌아온 나는 오페라의 유령 넘버를 흥얼거리며 잠에 들었다. 음악과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은 엄청나다. 그 두가지가 병존하는 지점에서 나는 항상 감격과 행복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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