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과 노력론 사이를 달리는 기차
인생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운에 큰 영향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노력이 운을 이길 수 없다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능력을 보기도 하지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은 적기(適期)가 있으며 성공은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것처럼 여러 조건이 충족됐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주명리학은 이러한 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개인이 타고난 명을 찾기 위한 방법을 논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주를 보는 점복학을 유사 과학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새로운 해가 떠오르면 거리에 즐비한 점집을 찾아서 자신의 사주풀이를 듣는다. 물론 사주를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제 미디어 플랫폼 '어피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537명의 대한민국 MZ세대에게 사주와 같은 운세를 확인해 본 적이 있는지 질문한 결과, 91.6%가 사주, 타로, 별자리 등의 운세를 확인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운세 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과 결과를 공유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크다고 덧붙였다. 해당 설문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점복학은 인스타그램 맛집과 비슷한 소통과 유행의 도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점집에 가서 사주풀이를 들어본 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도 운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새해가 밝을 때 뉴스에서 "OO 년이 왔습니다"라고 보도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냥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에 2024년 용띠 운세를 자주 검색한다. 토스에서 제공하는 '오늘의 운세'도 하루를 시작할 때 읽어본다. 내가 운세를 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요즘 운이 안 좋아서 어떻게 하면 불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이 타고난 운세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올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군대를 무사히 전역하면 다들 꽃길을 걷는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반년이었다. 복무할 때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몸은 여러 군데 고장 나기 시작했다. 작년 11월에 다쳤던 허리는 1월이 되자 심해졌고 MRI 측정 결과 초기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결국 코로나 이후 대학 생활을 즐기기 위해 들어갔던 운동부 동아리는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됐다. 멀쩡히 있던 사랑니는 말썽을 피웠고 원인 모를 피부 발진이 주기적으로 생겼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목이 부어서 따뜻한 물과 약으로 가라앉히는 중이다. 대학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코로나 학번이라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만화에서 보던 복학생의 삶을 내가 살게 될 줄이야. 막상 살아보니 상당히 고독하다. 복학해 보니 학과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른 과랑 통합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상황을 총체적 난국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다. 어디 인생이 뜻대로 풀리던가.
인터넷에 검색하던 와중에 2024년은 용띠가 삼재의 마지막 해인 '날삼재'에 해당한다는 글을 읽었다. 사주명리학에서 삼재는 3개의 재앙으로 9년 주기를 가지고 3년간 지속되는 시기를 뜻한다. '분명 올해는 청룡의 해라고 들었는데 용띠가 삼재라니!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은 삼재 때문인가?' 내년까지 반년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진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 같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두려워진다. 운세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불안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울적한 기분이 들고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최근까지 암막 커튼으로 햇빛을 가리고 침대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글도 써보려고 했지만 내 방처럼 어두워진 머릿속에서 생각의 조각은 쉽사리 모이지 않았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던 와중, 사람들과 만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저녁 약속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신세 한탄을 했더니 그들 중 한 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인생에서 뭘 해도 되는 해가 있었는지 생각해 봐.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 아니야?
정론이다. 삼재가 지나갔다고 갑자기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삼재가 오는 걸 두려워하고 타고난 운이 삶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개인의 삶에서 도전과 노력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이미 찾아온 우울감을 떨쳐내긴 어려웠다. '굳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까?' 노력은 힘든 주제에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시련은 피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거부하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운세도 안 좋은데 괜히 모난 돌 되지 말고 불운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의 삶은 이미 그렇게 살도록 정해져 있으며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 믿는다면, 우리는 운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운명론을 따르면 실패를 마주했을 때 자신을 비난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어진다. 어차피 내 이름을 단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달리고 있는데 운명을 거스르는 건 쓸데없는 행위가 아닌가. 굳이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눈앞의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최근 나에게 일어난 불행도 정해진 사건처럼 느껴지고 억울한 기분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우리는 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태어날 때 어떤 부모, 형제자매, 국가, 세계적 상황을 맞이하는가는 지극히 우연에 가깝다. 어떤 이가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재능을 꽃피우기 어렵다. 수없이 많은 청년이 전쟁 중인 시대에 태어나서 뜻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아스라이 잊혔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운은 어떤 존재일까? 대한민국은 갈등의 골짜기를 걷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 세대 갈등, 성별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재력, 시대적 배경, 성별과 같은 운의 요소를 삶의 장애물로 취급하고 불평등을 호소한다. 그들의 불평과 자조 섞인 말에는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화려한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부촌과 닭장처럼 빼곡하게 붙어 있는 원룸촌 사이에는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운의 틈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행운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패와 고통을 피하고 성공과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돈 걱정 안 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만나는 사람마다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살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자주 마주하고 원하는 인연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타고난 운으로부터 생기는 격차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벽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교나 사주풀이 같은 초자연적인 믿음에 의지하면서 미래가 나아지길 희망하기도 한다.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는 만사가 억울한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지내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딘가에 호소하고 싶다.
우울감과 무기력증은 우리의 정신을 침식시킨다. 마치 충치 하나가 주변 이빨을 점차 오염시키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허무적으로 바뀌고 삶의 변화를 거부한다. 나의 힘듦과 아픔에 사로잡혀 타인의 입장을 공감할 여유가 사라진다. 결국 개인의 자아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과 감정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기주의와 허무주의는 삶이 운으로 정해진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선상에 두고 누구의 운이 더 좋은지 저울질하는 것이다.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거나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보다 운이 나쁘다고 볼 수 있다.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주변 환경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면 하늘이 내게 준 운세를 원망한다. 모든 것을 운세 탓으로 돌리면 나를 괴롭히는 상황과 감정을 합리화하고 불안정한 자아를 외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기 싫은 노력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은 것이다.
삶이 운명을 따르는지 노력을 따르는지 알 수 없다. 세상은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우리의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변수가 너무 많다. 운명론은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심판자 역할을 하면서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삶을 운명이라 생각하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운명 앞에서 도전과 노력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저 받아들이고 해결할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무기력증이 정신을 지배한다. 그래서 내가 요즘 만사가 귀찮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에는 이와 같은 무기력증과 관련된 유명한 연구가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먼은 개들을 대상으로 한 전기충격 실험을 바탕으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도출했다. 실험 방식은 다음과 같다.
24마리의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공간에 넣어둔다.
A 집단은 개들이 코로 조작키를 누르면 전기충격을 스스로 멈출 수 있다. B 집단은 개들의 몸을 묶어서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전기충격을 준다. C 집단은 전기 충격을 주지 않는다.
24시간이 지난 후에 담을 넘으면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 세 집단을 옮긴다.
새로운 공간에 옮겨졌을 때, A 집단과 C 집단은 담을 넘어서 전기 충격을 피했지만, B 집단은 구석에 앉아서 전기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기 능력으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음에도 자신을 부정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셀리그먼은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그 경험으로 인해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처한 상황에서 자포자기한다고 주장했다.
학습된 무기력은 인간에게도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뼈 아픈 실패를 겪은 사람의 의지와 열정은 사그라들고 삶은 비관으로 물든다. 목표했던 일을 달성하지 못하면 노력과 운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 주변에서는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으라고 조언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허무함과 피로감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운명론을 따르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과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행위가 된다. 전기충격을 받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믿으면서 상황을 벗어날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다.
그렇다면 삶에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 무엇이 중요할까? 셀리그먼은 학습된 무기력을 바탕으로 삶의 낙관적 태도와 행복 수준에 집중하는 긍정심리학을 연구했다. 해당 연구는 인간의 원초적인 쾌락과 만족, 사회적 유대관계와 덕성 같은 요소를 고려하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한다. 연구자들은 무기력을 극복하려면 끊임없이 삶의 주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의식과 생각을 깨닫고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람마다 행복, 성공, 번영의 의미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우리가 롤플레잉 게임(RPG)을 하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것처럼, 성장형 사고방식을 토대로 행복과 성취감을 얻는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친구의 말처럼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실패와 불행을 인정하고 넘어가지는 못한다. 남들이 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내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지금 삶에 지쳐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원하는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쓰라린 채찍질보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중요하다.
살다 보면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들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한 날들을 보냈으며 실패에 좌절하고 때로는 자신의 운명에 분노했다. 하지만 시련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들의 정신은 성장하고 삶의 방향성은 뚜렷해졌다. 그들은 영화 같은 삶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종종 '위인' 또는 '영웅'이라 불린다.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은 모두 다르다. 출발선이 다른 경주 따위는 불공정하다고 한탄할 수 있다. 운이 나쁜 일을 겪으면 자신의 운세를 원망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능력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쓸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운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 사이로 창밖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까. 각자가 자신의 시간대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인생의 톱니바퀴를 굴린다. 우리는 정해진 선로를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쓸 능력이 있다면, 노력을 통해 어느 목적지에 정차할지 정도는 스스로 정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운명론보다 노력론을 믿고 싶다.
암막 커튼에 가려진 햇살이 창문 틈을 비춘다. 방 안에 놓인 시계의 바늘은 멈출 생각 없이 달린다. 커튼을 걷고 오랜만에 아침을 맞이한다. 내가 마주한 상황은 어느 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딱히 상관없다. 벼랑 끝에 몰렸다면 하늘을 보면 된다. 이왕 볼 거라면 땅보다 하늘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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