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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카페 Aug 05. 2023

재능과 노력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있을까?



2023년 새해가 밝을 때 글을 써보자고 다짐한 지 어느덧 반년이 넘어간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글을 쓰는 행위도 인내와 고민의 연속이다. 머릿속에 구름처럼 떠다니는 생각의 조각을 하얀 모니터 화면 위에 논리 정연하게 담기 위해서는 문장을 쓰고 지우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어젯밤에 적었던 만족스러운 문장이 오늘 읽었을 때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글이 유달리 안 써지는 날이 있다. 퇴근하고 책상에 앉아서 깜빡이는 텍스트 커서를 한 없이 바라본다. 타놓은 뜨거운 커피의 온도는 차츰 식어가고 컴퓨터 본체의 기계음과 시계 초침 소리가 얽혀서 귓가에 맴돈다. 생각의 조각은 재멋대로 합쳐져 기묘한 덩어리가 되며, 나는 하염없이 덩어리 앞에 앉아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한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알 길이 없을 때는 컴퓨터를 끄고 독서실로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조용한 공간에서 창의적인 생각과 세련된 문체가 담긴 책을 읽다 보면 답답한 기분은 날아가고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세상에는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잠긴다. 어떤 책은 한 번 펼치면 시간 감각을 잃고 빠져든다. 독자는 그 책의 주인공이 되어 사건의 절정을 맞이하고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 정도의 몰입감과 재미를 선사하는 작가들은 타고난 글쓰기 재능이 있음이 틀림없다. 마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재능이라는 표지판이 원하는 조각을 찾게 도와주는 것 같다. 그들이 가진 조각들은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는 부품이며, 글을 쓰는 과정은 조립식 장난감을 맞추는 것처럼 재미있고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닐까. 만약 선천적인 글쓰기 재능이 그들의 창의적인 구성과 섬세한 인물 설정의 바탕이라면, 내가 글을 쓰는 일로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좋아하는 글쓰기를 쫓아야 할까, 아니면 다른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일을 찾아 나서야 할까. 우리는 재능과 노력 사이에서 어디까지 타협해야 하는 것일까?




재능과 천재


누구나 자신이 도전하거나 꿈을 가진 분야에서 재능이 있기를 바란다. 축구를 좋아하면 메시나 호날두처럼, 미술을 좋아하면 피카소처럼, 혹은 나처럼 소설을 좋아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그 분야의 정점에 올라간 인물을 동경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노력만으로 뛰어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믿는다. 재능을 가진 자는 남들보다 정교한 기술과 통찰력이 있으며 자신이 몸담은 분야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천재'라는 마법적인 존재로 부른다. 비록 '천재'라는 벽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고 주저앉더라도, 경쟁자를 선천적 재능의 수혜자로 여긴다면 좌절의 고통을 피하고 자신의 한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더 이상 그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은 것이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재능이 있는 쪽이 더 나은 성과를 낸다. 따라서 사회와 부모는 아이들의 재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많은 부모가 어릴 때부터 IQ 테스트를 통해 자녀의 지능 수준을 파악하고 영재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학교에서는 직업 적성도 검사를 통해 각 학생의 성공 가능성이 높은 직업을 파악한다. 학생들은 수많은 연구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검사를 의심하지 않고 결과지가 추천하는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교육 시스템이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가 사회 구성원의 재능을 사전에 파악해서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직업을 결정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면 정의로운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국가론』 에서 이상 국가란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3가지 계급이 존재하며 각 계급이 지혜, 용기, 절제의 3가지 덕을 쌓아가는 사회 구조를 의미한다. 비록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친 현대 사회의 직업관은 과거보다 다양하고 복잡해졌지만, 여러 심리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파악하고 직업을 찾아가는 행위는 플라톤의 직업관과 동일 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가진 누군가에게 어떤 조언을 건네주어야 할까? 초기에 재능을 보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원한다. 주변에서는 그 직업이 당신의 천직이라 말하며 칭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탁월한 재능은 없어 보이지만 열정 있고 좋아하는 일을 쫓아간다면 대다수의 사람은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고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꿈은 빚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현대 사회의 수저계급론은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것은 금전적 여유를 가진 사람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그러니 재능도 안 보이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 꿈은 '사막 위에 오아시스 찾기'처럼 척박하고 위험한 길이 된다.




재능 너머의 가능성


재능은 분명히 존재하며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를 대표하는 모차르트는 5살 때 처음 작곡을 시작하고 6살 때 유럽 각지에서 연주를 했다. 14살 때는 로마 성당에서 울려 퍼진 합창곡을 한 번 듣고 악보에 받아 적었다. 그는 작곡가인 30년의 생애동안 600곡이 넘는 작품을 썼으며 모든 작품이 하나 같이 완벽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명석한 두뇌와 창의적인 관점을 가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같은 천재들은 인류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작곡을 좋아하고 열정이 있지만 절대음감 같은 음악적 재능이 없다. 타고난 음색이나 리듬감도 없으며 주기적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자작곡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아이의 부모라면 음악을 하라고 응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아이의 흥미보다는 재능이 보이는 길을 찾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재능 없는 노력이 끝없는 실패와 좌절에 맞닥뜨리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띄는 재능이 없을 때는 공부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공부를 잘하면 적어도 직장에 취직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니 재능의 유무는 삶의 길을 판가름하는 결정요인으로 보인다. 재능이 없으면 공부를 하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사교육비와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끝없이 올리고 있다. 학벌주의 속에서 무언가를 향한 흥미와 열정은 경쟁 앞에서 무너지고 노력의 방향성은 성적이라는 숫자만을 가리킨다. 그래서 재능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우리 사회에서 재능이라는 단어는 자주 거론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재능이라는 화려한 폭죽에 시선이 사로잡혀 그 속에 타오르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능의 본질


재능과 노력의 상관관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심리학자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는 그녀의 저서 『그릿』 에서 재능이 삶의 성공을 이루는 고정값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 집중해야 할 능력은 그릿(Grit), 즉 목표를 향한 장기적인 열정과 끈기다.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자신의 일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뚜렷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삶의 성취감과 성공이 IQ와 외모 같은 선천적인 요인이 아닌 그릿 지수와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릿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근성이다. 그녀가 학교에서 중학교 수학을 가르칠 때 IQ는 좋은 성적을 받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구분하는 결정요인이 아니었다. 그보다 수학에 흥미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아이가 결국에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릿 지수가 높은 사람은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삶의 만족도가 높았다. 어딜 가나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보다 꾸준히 발전시키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 재능에 매혹된다. 올림픽 선수들의 완벽한 퍼포먼스를 재능의 영역이라 부르며 온전히 감상한다. 다수의 사람이 경기에서 퍼포먼스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진부한 반복 과정보다는 짜릿한 한 방 승부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작가는 노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아래의 성취 그래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더크워스의 성취 그래프 [1]


재능은 노력을 기울일 때 기술이 향상되는 속도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 예를 들어 IQ가 높은 사람은 같은 지식을 배우더라도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그것을 습득한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은 상당한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취는 습득한 기술을 사용할 때의 결과물이다. 여기서도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노력이 없다면 성취는 빈곤해진다. 그러므로 노력은 두 공식의 강력한 매개변인으로 작동한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더라도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그에 걸맞은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 어릴 적에 읽은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주는 교훈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릿을 키우는 방법


그렇다면 성공에 중요한 지표인 그릿을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꾸준한 열정과 끈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생의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 길을 선택했다가 포기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뚜렷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최상위 목표가 무엇인지 정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왜(why?)"라는 질문을 자문자답 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찾고 그것을 지지하는 열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가치관은 열정의 불꽃을 유지시키는 인생철학이 된다. 만약 그것이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목표한다면 철학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열정을 투자할 수 있는 관심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흥미 없는 일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관심사를 발견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가 서른이 될 무렵, 야구 경기를 직관하다가 갑자기 하늘의 계시처럼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계시를 얻기보다는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심사를 찾는다. 다양한 경험에 도전하고 세상과 소통하다 보면 관심사를 얻을 확률이 올라간다. 한 연구에 따르면, 개인적 관심과 일치하는 일을 할 때 직업 만족도가 높다 [2]. 그릿의 전형들은 관심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장기적으로 증진시키는 과정을 따른다. 그들은 작은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고 시간을 투자해서 전체를 꾸려가는 장인이다.


결국, 그릿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선택과 책임이 관심사부터 인생철학까지 이어진다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뛰어넘으려는 존재가 된다. 인생은 마라톤이며 근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하는 에너지다.




노력이라는 재능


유튜브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 에서 래퍼 이영지는 축구선수 조규성과 재능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조규성 선수는 "노력만 하는 선수가 재능을 가지고 노력하는 선수를 이기기 힘들다" 말하며, 스스로가 "재능이 있지 않지만 끝까지 노력하는 선수"라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은 이영지는 "노력도 재능이다"라고 말하며 조규성 선수가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정말 큰 재능"을 갖고 있다고 위로한다.


나는 이 말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조언이라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을 마법처럼 여기고 스스로의 한계를 규정한다면 내 안의 열정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한계의 틀에 갇혀 자신을 향한 의구심과 포기를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재능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 재능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나야 하며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반면 우리 사회는 노력이라는 요인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패는 노력부족'이라는 단순한 공식 속에서 살다 보면 노력조차 하기 싫어진다. 나는 우리가 개인의 실패를 지금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희망한다. 어떤 실패를 겪었어도 상실감을 털고 목표를 향해 다시 전진하는 사람은 끝내 성취를 얻는다. 사회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넘어지지 말라고 당부하기보다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괜찮다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넘어져도 괜찮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어떤 실패와 좌절을 앞두고 있다면 이 말을 하고 싶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노력의 도착점에서 환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향해 외쳤으면 좋겠다.

힘들었어, 그래도 좋았어!

삶이 쉽지 않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신의 능력과 예상 밖에 일이 수없이 일어나다 보면 다시 일어설 힘조차 잃어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고난을 극복할수록 그 실체가 섬세하고 아름다워진다. 마치 비 온 뒤에 하늘을 가르는 무지개처럼 그의 가치관은 다채롭고 빛이 난다. 경험을 양분 삼아 자신의 목표와 사명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꾸준히 살아가는 인간은 끝내 달콤한 성취감을 맛볼 것이라 믿는다.


실패를 털고 일어나자.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n't built in a day).






Reference

[1] 앤절라 더크워스. 그릿(GRIT). 비즈니스북스, 2016.

[2] 어윤경. (2010). 전공-직무 일치와 직업 가치관에 따른 직무 만족도 변화 추이. 상담학연구, 11(2), 72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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