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기가 있는데 왜 언어를 배워야 할까?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20세기 최고의 언어 철학자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나는 언어와 연이 깊은 삶을 살았다. 학창 시절부터 일본 문화를 좋아해서 일본어를 공부했고 브라질에서 유학하면서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외국어 필수 교양으로 스페인어 강의를 들었으며 2년 동안 학생들에게 입시 영어를 가르쳤다. 입대 후에도 언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단어를 외우고 간단한 문장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근무 후에 몸이 피곤할 때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듣기 능력을 키웠다. 내가 언어 학습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인생에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업 스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언어를 학습하는 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지평선을 넓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요컨대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며, 나는 운 좋게도 어린 나이에 그 열쇠의 매력에 빠졌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흥미 있는 언어 한 두 개 정도는 꾸준히 공부하라고 추천한다.
우리는 언어를 왜 배워야 할까? 4차 산업 혁명에 발맞춰 등장한 인공지능 덕분에 번역기로 전 세계 언어를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 직종에서 번역가는 언제나 상위권에 위치하고 대학에서 어문계열 학과는 낮은 취업률 때문에 지원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어를 공부하는 게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 판단하고 언어 학습과 담을 쌓고 지낸다.
그런 우리나라에서 언제나 인기를 누리는 언어가 하나 있다. 바로 영어다. 어린아이부터 중년의 직장인까지 모두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어디를 가도 영어 학원이 존재하고 서점에는 영어 공부 책이 항상 베스트셀러 코너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의 영어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영어가 성공적인 미래의 필수조건이라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영어 1등급을 맞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취업 준비생들은 영어를 못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낮아진다. 직장인들은 영어 실력이 진급과 관련 있기 때문에 여가 시간을 영어 공부에 투자한다. 결국,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험, 취업, 진급과 같은 사회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 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꾸준한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하지만 유학 생활 동안 다수의 한국인 유학생과 교류하고 대학생 때 2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영어에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영어를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로 생각하고 지루함과 불평 속에서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지를 풀었다. 그리고 원하는 성적을 받으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았다. 시험 이외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영어를 가르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선생님은 어떻게 영어를 꾸준히 공부하셨나요?"
이 질문 속에는 영어처럼 지루하고 어려운 과목을 무슨 재미로 공부했는지에 관한 의문이 들어있다. 질문자의 관점에서 영어는 알파벳 그 이상이 아닌 것이다. 나 또한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영어는 그저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귀찮은 과목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아버지의 직장 사정으로 브라질 유학을 가게 됐다. 생전 처음으로 덥고 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나랑 다르게 생긴 외국인들(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외국인이지만) 사이에서 학교 수업을 들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 수업을 따라가기는커녕 같은 반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도 버거웠다. 심지어 다니던 국제학교는 브라질인 비율이 높아서 학생끼리 대화할 때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마치 판도라 행성에서 나비족에게 납치된 아바타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언어 정복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국제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급한 건 영어였다. 단어책 한 권을 구매해서 통째로 외웠고 수업을 들을 때는 네이버 사전을 곁에 두고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찾아봤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업은 따라가기 힘들었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력에 비해 늘지 않는 영어 실력은 큰 스트레스였고 유학 생활을 위한 자신감과 열정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대화 하나가 나의 여정의 전환점이 됐다. 수학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기운 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길래 단어장에서 봤던 숙어를 말해봤다.
"You look like feeling under the weather, what happens?"
(너 몸이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앞자리에 있던 친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표현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단어장에서 무작정 외웠다고 답하자 그 친구는 "feel under the weather"의 유래를 알려줬다. 이 표현은 몸이 안 좋은 어부나 선원이 날씨를 피해 배의 갑판 아래로(under the deck) 들어가는 행위를 뜻한다. 그래서 날씨를 피해야 하는 상황, 즉 '몸이 아픈 상태'를 비유한 표현이다.
과거의 행동 방식이 현재의 언어 표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때부터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다. 언어는 그저 문자의 나열이 아니다. 영어는 영어권 국가의 문화, 역사, 그리고 사회적 행동 모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많은 독해 지문을 풀고 단어책을 외우더라도 이 사실을 간과하면 문화적 확장을 이룰 수 없다. 흔히 말하는 '한국식 영어'는 언어의 역할을 정보전달로 간주하고 독해와 문법에만 치중해 있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없고 외국인과 대화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나는 단순 암기를 버리고 언어의 문화적 특징에 집중했다. 원어민이 사용하는 표현을 배우기 위해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해당 대본(script)을 주기적으로 읽었다. 흥미로운 문단이 있으면 따로 노트에 적어서 복습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드라마 <Breaking Bad>에서 "bite the bullet"이란 숙어가 나온다. 직역하면 "총알을 물어라"이지만 대본에는 "고통을 참다"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그 이유는 중세 시대 전쟁터에 마취제가 없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고통을 참기 위해 입에 총알을 물고 견뎠던 행동 때문이다. 영어는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언어다. "Piece of cake(아주 쉬운 일)", "when pigs fly(말도 안 돼!)" 같은 표현을 배울 때면 다음에는 어떤 흥미로운 문장이 나올지 기대된다. 언어와 문화의 연결고리가 주는 즐거움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무역이 이루어지고 비즈니스 기회가 생긴다. 다양한 문화는 서로 교류하고 섞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언어를 배울 이유가 된다. 언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어느 순간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확장하고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온다.
나의 세계는 유학생활을 통해 발전했으며 그 성장의 밑바탕에는 나만의 언어 학습이 있었다. 흥미로운 표현을 발견하면 대화할 때 써보면서 영어권 문화에 점차 녹아들었다.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어를 통해 남미권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학창 시절 좋은 교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과 소통하면 내가 몰랐던 세상이 열린다.
브라질 사람은 파티를 6시에 연다고 말하면 한 시간 늦은 7시에 시작한다. 브라질 친구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혼자 파티장에 외롭게 앉아 있을 뻔했다.
미국은 야구와 농구를 제치고 미식축구가 제일 인기 있는 스포츠다. 옆 자리에 앉은 미국인이 하루 종일 미식축구 얘기를 해서 그런지 지금도 경기를 때때로 챙겨본다.
사소한 배움 같지만 그들의 문화에 관심이 없었다면 몰랐을 세상이다. 다양한 문화가 내 안에 녹아서 새로운 지식과 취미가 된다. 그 매력적인 이유 때문에 지금도 여러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
언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생겨도 공부를 시작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외운 단어는 몇 시간 만에 기억에서 사라지고 듣기 실력은 발전할 기미가 안 보인다. 언어 공부는 마라톤과 같다. 똑같은 페이스로 꾸준히 전진해야 한다. 그 기나긴 트랙 위에서 내가 사용했던 유용한 언어 공부법 몇 가지를 소개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언어는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 아니다. 언어는 그 문화권 사람들의 행동 모습과 사고방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처럼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려운 단어를 외우고 수능 독해 문제를 완벽하게 풀 수 있어도 외국인과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언어를 통해 세상을 넓히고 싶다면 미디어 매체를 이용하자. 나는 넷플릭스와 외국 뉴스를 주기적으로 공부한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편하게 시청하고 대본을 뽑아 읽다 보면 특정 상황에서 어떤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한 지 알기 쉽다. 외국 일간지는 영국의 <The Gardian>와 미국의 <CNN>을 주로 본다. 여러 뉴스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문화적 흐름에 올라탈 수 있다. 이보다 쉬운 일간지는 중앙일보의 <Korea JoongAng Daily>가 있다. 매일 한 두 편씩 글을 읽다 보면 좋은 언어 학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공부하는 게 지루한 반복 운동이라 생각한다. 복습을 해야 하는 건 맞지만 흥미를 버릴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 뚜렷한 목적성이 있다면 자발적인 언어 학습이 가능하다. 영어 과외를 하다 보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학생들이 영어를 배워두면 좋은 점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 남자 중학생은 야구를 좋아해서 나중에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아이에게 영어로 소통할 수 있으면 세계의 유망주를 관리할 수 있는 글로벌 에이전트까지 노릴 수 있다고 조언 하자 흥미를 가지고 영어 잘하는 법을 질문했다. 그 아이를 위해 쉬는 시간에 재미있는 영어 표현을 알려주고 목적성을 잊지 않게 했다.
나의 목적성은 소통이었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의 토크쇼나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을 자주 봤다. Conan O'Brien, Jimmy Fallon, 그리고 Louis C.K.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관중을 웃기는지 주목했다. 코미디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친구도 많이 생기고 듣기 실력도 발전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우리는 언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언어가 주는 기회를 생각해 보고 스스로 목표를 세워보자. 그럼 공부는 목표를 향한 보람찬 발걸음이 된다.
마라톤에 지름길은 없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복습은 권장이 아닌 필수다. 이미 했던 공부를 다시 하는 건 지루하고 귀찮다. 그러나 진부한 얘기지만 복습 없이는 언어를 발전시킬 수 없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모국어도 수많은 반복을 토대로 다듬어졌다. 꾸준함의 비결은 페이스 조절이다. 하루에 70개의 문장을 외우기보다는 일주일에 10개를 공부하고 복습을 거치는 게 효과적이다. 나도 아직 서툰 스페인어를 하루에 2 문장만 공부한다. 복습은 자신의 성향에 맞게 하면 된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공부했던 부분을 편하게 훑어본다.
나는 공부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애당초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공부할 때는 최대한 재미있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다. 아래는 내가 경험했던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이것이 정답은 아니기 때문에 조언 정도로 읽고 넘겨주길 바란다.
단어만 무작정 외우기: 오해하지 말자. 단어 실력은 매우 중요하며 기본적인 단어는 꼭 외우고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단어를 많이 외운다고 언어 실력이 그만큼 비례하지 않는다. 문화와 소통, 두 가지 언어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어느 정도 필수 단어를 알게 됐다면 다양한 글을 읽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자막 없이 미디어 시청: 유학생은 자막 없이 영화를 본다는 믿음이 있다. 내 경험상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모국어가 아니라면 다 자막 켜고 본다. 한국 영화를 영어 자막 켜고 볼 정도면 이해한다. 그러니 자막 없이 영화를 시청하기보다는 앞서 말했던 대본 공부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무작정 유학 가기: 많은 사람들이 유학(워킹 홀리데이나 교환학생)을 가면 언어가 자연스럽게 늘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유학길은 생각보다 고되고 외롭다. 실제로 많은 유학생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하거나 언어의 벽에 막혀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만약 유학을 생각한다면 내가 했던 공부 방법을 사용하길 권한다. 준비를 못한 탓에 나는 꽤나 고생했다. 준비가 된 상태에서 도전하는 유학은 적극 찬성이다. 세상의 크기를 배우고 자아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21세기는 글로벌 시대다. 지금처럼 세상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연결된 적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가슴이 떨린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 여러 곳에서 새로운 지식과 만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했다. 많은 목록 중에서 '여러 언어를 공부해서 세상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기'가 있다. 유학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코미디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 목표가 오늘도 책을 펴고 언어를 공부하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 재미있고 보람차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란 경쟁의 도구다.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 여긴다. 하지만 경쟁과 시험의 투기장 위에서 언어 공부를 한다면 그 본질은 우리 곁을 떠나간다. 언어는 나를 세상에 알리고 내가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소통의 열쇠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공부한다면 어느 순간 새로운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물론 흥미와 열정을 잃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언어를 배우고 세상의 문을 열어보자. 그리고 새로움의 팔레트로 삶의 하얀 캔버스를 다채롭게 칠해보자. 분명 멋진 그림이 나올 것이다.
『행복을 얻는 방법』
https://brunch.co.kr/@koroshst2/6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koroshst2/9
※ 작가 구독, 공유, 좋아요와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