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의 한 달

by OooAaa

“딱시! 딱시!”

당신이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우붓을 찾는다면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이다. 동남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고젝, 그랩, 우버 등을 전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 택시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 플랫폼의 진입을 막고 있다 한다. 때문에 우붓 지역 내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려면 거리에서 호객하는 기사들을 상대로 매번 흥정을 해야 한다.


photo_2020-02-15_22-38-53.jpg 길리 섬의 쓰레기통


길리 트라왕안에서는 “머쉬룸”이란 말이 귀에 익게 될 테다. 머쉬룸은 일종의 마약이다. 과거 길리 섬이 서양 배낭여행족들의 파티 섬이었음을 떠올리면 공공연한 마약 판매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발리 섬에서 1시간 30분여 배타고 들어와야 하는 길리 뜨라왕안 옆으로는 길리 메노, 길리 아이르라는 섬들이 이웃해 있다. 섬은 작다. 주민은 8000여명. 자전거로 1시간이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이 섬에는 자동차가 없다. 오토바이도 없다. 이동수단은 ‘치도모’라 불리는 마차와 자전거뿐이다. ‘ORGANIC’ 분류가 따로 있는 길가의 쓰레기통에서 이 섬의 컨셉을 알 수 있다. 주민자치회와 프랑스인 다이버가 주축이 된 길리 에코 트러스트의 협력으로 섬이 운영되고 있다 한다. 개도 없다. 대신 고양이 천국이다. 길리 섬 주민들은 이슬람교를 믿는지라 개를 불길하게 여겨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섬에 개를 들이지 않기로 마을회의에서 결정했다고.


이때문에 생애 처음 찾았던 발리에서의 대부분의 여정은 정작 발리가 아닌 길리 3섬에서 보냈다. 비록 섬에 담수가 없어 바닷물을 받아쓰고, 수압도 지극히 낮은데다 온수도 나오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말이다. 산 좋고 물 좋고 와이파이까지 잘 터지길 바란다면 그건 욕심, 아니 탐욕이지요.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는 바다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가 않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튜브에 매달려 둥둥 떠 있다가 자리로 돌아와 독서를 하다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가 더워지면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가 또다시 활자 속으로.



photo_2020-03-13_14-56-06.jpg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빛의 길리 바다


인도네시아 작가인 쁘라무디아 아난다 또르의 ‘인간의 대지’는 유럽과 그 문명을 동경하던 원주민이 실상은 야만적인 식민 통치의 현실을 목도하고 민족에 눈을 돌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무려 35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몰랐다. 현대로 치자면 주식회사 형태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회사의 설립에서 최초의 증권이라는 것이 등장했단 것도 새로운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네덜란드가 물러간 사이 인도네시아는 연이어 일본의 침략 지배를 받는다. 네덜란드 못지않게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는 3년에 그칠 뿐이었지만 이들의 지배에는 생각지 않은 순기능이 있었다 한다. 식민 기간 동안 네덜란드어와 영어 사용을 금지하고 지금의 공식어에 해당하는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만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독립 이후의 인도네시아 국가 통합에 도움이 된 것. 인도네시아는 총 인구가 2억 7천에 이르고, 사용되는 언어만 수백 개. 아하, 값싼 여행만 다닐 줄 알았지 동남아 역사에는 참 무지했네.


우붓에서는 그런 경우가 잘 없었는데 길리 섬 사람들은 순박하다 해야할 지 셈이 흐리다 해야할 지, 종종 계산이 틀리곤 했다. 저기요, 방도 업그레이드했고 쥬스도 더 시켜먹었거든요? 이래서야 셈 빠른 중국 사람들 상대가 되겠나. 이 역시 잘 몰랐는데 인도네시아를 비롯 동남아에서 중국인들은 서구에 빗대자면 유태인과 비슷한 포지션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의 유입은 식민 시대 플랜테이션 농업의 유산이다. 화교들이 동남아 각국의 경제 부문을 꽉 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입 시험에 패널티를 주는 등 화교에 대한 차별 정책까지 시행한다고. 과거 발리에서는 화교대량학살 사건이 있기도 했고. 여기에 더해 인도네시아 역시 공산당 무리를 없앤다고 지난한 시절을 보냈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패망하자 인도네시아를 재침략한다. 이것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 세력은 네덜란드의 공세에 패퇴를 거듭한다. 한편,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은 인도네시아 독립 세력의 주축인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내 공산당 세력을 괴멸시키는 것을 보고서야 2차 대전이후 피폐해진 네덜란드에 대한 원조를 끊겠다고 압박하고, 인도네시아는 독립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공산당 때려잡기가 반복되었던 모양.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에 잘 나와 있다.



photo_2020-03-13_14-50-56.jpg 미드 한니발은 고어하다구요. 주의!



인도네시아 영화는 잔인한 액션, 호러 영화가 주류로 ‘레이드’가 유명하다. 몇 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내 마음의 복제’라는 영화가 있던데 인터넷으로는 볼 경로가 전혀 없어 아쉬울 따름. ‘내 마음의 복제’는 불법 DVD를 만드는 남자와 마사지사 여자의 로맨스에 인도네시아 현실을 겹쳐놓은 드라마다. 숙소에 미드 한니발 DVD가 있길래 의아하더라니. 인도네시아는 인터넷이 느려 여기 사람들은 보통 불법 DVD로 영상물을 본다고.


이 곳 사람들은 음악을 참 좋아한다. 라이브 밴드의 연주 실력이 수준급일뿐더러 어딜 가나 기타를 둘러매고 뚱땅거리는 사람들이 꼭 있다. 메노에서 들렀던 한 식당에서는 식당 직원들이 젬베며 기타를 하나씩 들고 오더니 반주에 맞춰 저희들끼리 떼창을 부르기도. 정식 공연인가요? (수줍게 웃으며) 아니오, 그냥 우리 취미에요. 삼삼오오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니 듣기 좋았더라. 손님이 우리 뿐이었어서 어쩜, 운이 좋았지.


숙소 창 너머 작은 목초지에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야자수가 바람에 일렁이고, 제푼 플라워 트리가 아침마다 흰 꽃을 떨군다. 바다가 바로 곁이고 조용하기까지 해서 조식 후 오전은 테라스에서 보내곤 했다. 하지만 눈에 띠지 않는 섬 한 구석에는 빈 생수병들이 넘쳐날 테지. 섬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걸까? 이 미스테리는 풀지 못했다.



photo_2020-03-13_14-50-13.jpg 따나롯 해상사원의 일몰



발리에서의 막바지 여정으로 서퍼들의 성지라는 짱구로 이동. 새롭게 뜨고 있는 발리의 힙 플레이스다. 굉음을 내며 떼를 지어 다니는 오토바이에 뜨거운 볕, 인도 없는 거리. 우붓과 마찬가지로 오토바이 없이 다니기는 힘들다. 짱구가 힙하다고 함은, 한국에 빗대자면 상수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될까. 상수보다는 좀 더 널찍한 지역에 걸쳐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오가닉 까페와 음식점들, 편집샵들이 드문드문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힙’을 증명이라도 하듯 까페 안으로 한 테이블 건너마다 애플 로고가 보인다. 인당 10여만 원의 입장료로 즐기는 비치클럽도 빼놓을 수 없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짱구의 높은 파도를 오르내리는 서퍼들의 기가 막힌 몸놀림이 이곳의 정수다. 여기서 차로 20여분 달리면 따나롯 해상사원이 있다. 현지인도 많이 찾는 관광지로 일몰과 어우러진 해상사원의 모습이 장관이다. CNN이 선정한 세계 10대 풍경, 뭐 이런 리스트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브라더”


당신이 남자라면 발리에서 또한 자주 듣게 될 말 중 하나. 여행 준비를 위해 ‘발리 여행’으로 검색을 돌리면 ‘여자혼자 발리여행’이란 제목 내지 태그를 쉽게 볼 수 있다. 발리의 우기는 고작 십여 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욕이 나올 정도로 덥고, 간혹 부스스한 비가 내릴 때면 서양남들은 우산 없이 간단하게 후드만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다니곤 한다. 왜냐, 비올 때 우산을 쓰면 남자답지 못한 게이스런 행태라는 게 서구 남성들의 생각이라고. 비 맞는 걸 질색하는 짝은 우산을 쓴 자신을 서양남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 증언하기도. 발리는 여자 혼자 여행을 다녀도 전반적으로 ‘안전’하긴 하다. 캣콜링은 피할 수 없겠지만. 낯선 여행지를 찾아도 익숙한 현실은 또 어디에나 있네요, 시스터. 그래도 떠나보아요.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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