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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Aug 06. 2020

나쁜 아이

나를 나 답게 해주는 것, 그리고 정체성-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자.

 "딸, 나쁘다는 건 말이야, 나뿐이라는 거야."

 

 갑자기 아버지께서 툭 던지듯이 말씀하셨다.

 "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건가요, 잉?"

 "그렇지, 그렇지!"

 별생각 없이 대답한 내게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시며 씨익 웃으셨다.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과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요즘 두 분이 푹 빠지신 드라마인데, 돌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재였던가, 뭐 그렇다. 드라마는 잘 안 보는 나지만 오래간만에 뵙는 부모님이 반가워서 두 분 사이에 끼어들어서 함께 보고 있었다. 물론 저 사람은 왜 저러느냐, 둘이 뭔 관계냐, 등의 질문 폭탄을 던져대면서. 그러던 중에 악역을 맞은 배우가 어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못된 일을 벌이는 걸 보시며 아버지가 하신 말이었다. 그전에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데 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하튼 이런 유의 뜬금없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일종의 선문선답은 어릴 때부터 해와서 꽤 익숙하지만 매번 잔향이 남아서 혼자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아버지가 그 점을 노리셨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때인가부터 '나답게 살자'는 말이 화두에 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별생각 없이 흘러가는 삶에 불현듯이 출몰한 이 말은 제법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과연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코로나 사태가 여전히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이 시대에 코로나 블루라고 하는 없던 증상이 생겼다. 이름이 지어 붙여졌다는 것은 하나의 병으로서 인식되고 인정된다는 소리다. 이 신종 불안 증세가 우리 삶 곳곳에 불편함을 끼친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분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아무리 지나가는 과정이라고는 해도 꽤나 지독한 녀석이리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녀석 말이다.



 최근 안 하던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유학 시절에 알던 동생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참 밝고 매사에 열심히 하는 녀석이었다. 나보다 한참은 어리지만 대단하달까 존경스럽달까, 뭐 그런 기특하고 배울 점이 많은 동생이다. 나는 작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타지에서 아직도 용감하게 살아남아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이 없는 내가 부러워할 정도의 실행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요 며칠 사이에 다소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SNS 계정에는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글들이 올라왔고 그녀의 경력에 관한 영상이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가 올라오던 유튜브 채널에는 고민을 토로하는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영상에서 그녀는 코로나의 여파로 인해 막막해진 삶에 대한 고뇌를 털어놓고 있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갑게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움직임 분석가로 훈련을 받아온 내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들은 하나하나 걱정과 염려로 다가왔다.




 두드러진 특징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


미간에는 주름이 내 천자 모양으로 잡혀 있었고 어깨는 스트레스의 신호인 승모근의 긴장감과 함께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얘기를 하던 도중에 두 손으로 머리 양 옆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였는데, 어느 누가 봐도 고뇌하는 모습 이리라. 이 고뇌의 행동은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양쪽 관자놀이 근처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듯이 두 손을 갖다 댔다가 내리고,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관자놀이 쪽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등 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온몸으로 고민의 흔적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유형이라 자칫 웃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방향으로 볼 때는 양 옆으로 긴장감 있게 당겨져 있고 눈썹도 내 천자를 지지하듯이 미간 쪽으로 한데 모이며 살짝 위로 올라가서 이마 중간 지점에서 짧은 주름을 자아내는데, 전부 두려움을 표현하는 Subtle Expression, 즉 미세 표정보다 더 미묘한 표정의 변화로, 어떠한 감정의 시작이 되거나 이 표정을 짓는 사람이 해당 감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며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아질지 알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더 이상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현실과 타협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상이 끝을 향할수록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보였지만 일말의 우려는 떨쳐내지 못한 것 같았다. 눈 앞에 펼쳐진 5분가량 되는 사랑하는 동생의 걱정 퍼레이드를 보고 있자니 언니 입장에서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락을 해보았지만 시차가 큰 탓인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되려 걱정만 더 커졌다.


 사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비단 코로나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 동생의 나이를 생각하면 한 번쯤은 지나게 되는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이 시기에 흔히들 나다운 것이 뭘까 고민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답을 알고 있다면 그녀에게 알려줄 텐데. 못난 언니라고 자책한들 답이 나올 리 없다. 연락이라도 닿으면 하다못해 하소연이라도 들어줄 텐데.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이 동생이 나쁜 아이라는 것은 아니다. 정말 마음씨도 예쁘고 야무진 친구니까. 혹시 모를 오해를 풀기 위해 내 이야기를 하겠다. 이 동생이 한 길만 진득하게 파온 아이라면 나는 정반대였다. 나는 '기면 기고 아니면 말고'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성격이다. 이 성격의 장점은 제법 수용력이 좋다는 것과 뒤끝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단점은 관심이 없다는 것.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니까. 심지어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겨도 그때 잠깐뿐이다. 매니악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성격이랄까, 여하튼 덕분에 친화력도 사교성도 꽤 좋지만 왠지 모를 냉정함도 풍겼던 것 같다. 원래 외과 의사가 꿈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이과로 진학했고 수학 2 첫 단원인 벡터에서 게거품을 물며 좌절했다. x와 y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z까지 나오니 이거야 원. 뭐 사실 이미 미/적분에서부터 놓기 시작한 정신줄을 간신히 잡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좌절이라는 거창한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하기로 했고, 그다음 날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께 해맑게 외쳤더랬다.


  "선생님! 저 예체능이요!"


  그렇게 예체능계로 반을 옮겨 고등학교를 마치고 실용음악과로 대학 진학을 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 전공 악기만 두 번 바꿨고,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영어 유치원에서 학사학위의 필요성을 느껴서 통번역과 영어 전공으로 편입을 했다. 그리고 한 일은 영어 선생과 홍대 버스킹. 그 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가려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무용과 대신 무용 치료학과로 대학원을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만난 것이 바로 나를 서른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첫 해외생활을 결심하게 하고(게다가 혈혈단신으로 초짜에게는 꽤나 험난한 뉴욕이었다) 움직임 분석가로 만든 LMA, 통칭 ‘라반 움직임 분석’이다. LMA는 내 인생에서 아주 굵직한 한 획을 그은 녀석이다. 원래부터 행동 분석과 같은 분야에 관심이 있던 터라 시작 전부터 엄청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학문과의 만남은 내게 움직임이라는 새로운 언어와 사랑에 빠지게 했고 배울 때마다 새롭고 그 과정이 너무나 즐거워서 필수 과정을 다 마친 뒤에도 교수님께 졸라서 다시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청강까지 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능동적인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열정이었다. LMA를 도구로 쓰는 움직임 분석가를 CMA라고 부르는데 그 교수님이 바로 CMA 셨고, 그분에게 추천받아 알게 된 곳이 지금 내가 나온 세계 유일의 CMA양성 기관인 뉴욕 브루클린 소재의 림스(LIMS: Laban/Bartenieff Institute of Movement Studies)이다.  


 이런 다소 특이한 전적 때문에 다들 날 보면 대체 정체가 뭐냐고 신기해하거나 잘하는 게 많아서 좋겠다고 한다. 소위 ‘정체불명’이라는 수식어가 기분이 좋기도 했다. 뭔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으니까. ‘특이한 아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자부심의 기저에는 자기 비하가 숨어있었다. 이것저것 잘하는 면이 내게는 되려 콤플렉스였다. 뭐하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두루두루 잘하는 것들이 취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자기 비하가 만들어낸 나의 ‘특이한 사람’이라는 가면은 림스 유학 시절에 깨졌다. 아니, 깨졌다기보다는 위로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더 적절한 말이리라.


 분석가가 되려면 자격 논문을 써야 한다. 그때 나를 담당한 할아버지 선생님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네 입학 에세이를 보면 참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던데, 참 다양한 경험들을 했겠구나. 재능도 많고 여러모로 흥미롭더라.”


 늘 들어왔던 말이지만 뉴욕까지 와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겸연쩍음 반, 시큰둥함 반으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들 그렇게 보기는 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뭐 하나 제대로 잘하는 건 없다는 거잖아요. 빛 좋은 개살구죠, 뭐.”


 “나도 너 같았어. 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전공 장르가 있고 나머지는 그냥 부수적으로 조금씩 하는 정도인데, 나는 이렇다 할 전문장르는 없고 두루두루 잘하는 무용수였거든. 그런데 LMA는 그런 사람이 더 잘해.”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뱉은 그 한마디에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톡, 하고 깨지는 것 같으면서 곧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러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나를 우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동기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는 했다. 나도 모르게 여기에서는 특출 난 아이가 되어있었다.


이랬다 저랬다, 이것저것 하며 내가 만들어낸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선생님의 한 마디에 싸악 정리되더니 그냥 내가 남았다. 다르게 말하면 LMA는 내게 단순한 분석 도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을 뿐 아니라 자존감도 높아졌고, 자기반성을 통해 결국 내 일에 있어서 만큼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남들보다 늦든지 말든지 내 속도로 내 길을 가자, 그거면 된다. 나는 나다.






 내가 처음에 아버지와의 대화를 언급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속의 수많은 ‘나’들이, 나뿐인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을 방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동생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였다면 나는 ‘내가 누군지 그게 알 바냐’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내 속에 내가 많았으리라. 드러나는 양상만 달랐을 뿐.


 나답게 살기, 나를 나답게 살게 해주는 것 등의 주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레 인식되기 시작한 주제가 있다. 바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뭐 이런 유의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말이기도 하고 이기적인 말이 되기도 한다. 그와 함께 나쁜 남자, 나쁜 여자의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점점 '나뿐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세상'이 아닐까. 뭐든지 과하면 체한다. 내 속에 내가 그렇게 많아서야 정리가 되겠는가. 인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들 하는데,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몸으로 내가 이렇게 많아서야 당신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건 고사하고 그 수많은 나 중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내 속의 수많은 내가 과연 어떤 것을 해야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걸까. 만약에 나답게 살려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준다면,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나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나는 나 자체로 나답다. 내가 바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임에도 우리는 자(自)가 아닌 타(他)에서 나다움을 찾는다.


 나라고 해서 별반 다를쏘냐. 나 역시 매한가지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것에 내가 들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사람마다 일처리 방식이라던가 태도가 다르다. 이것이 나의 행위에 내가 들어가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그렇다면 나다움이 들어가 있는 일이 결국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물론 거울을 봐야 이에 고춧가루가 꼈는지, 얼굴에 밥풀이 묻어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타(他)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나는 아닌 것처럼 타(他)에게서 나를 찾을 수는 없다. 단지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상태가 어떤지 체크할 수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동생은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그 일을 할 때 가장 그녀답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움직임 분석가인 나는 분석을 할 때 가장 나답다. 이건 그저 그녀와 내 모습을 서로의 눈을 통해 소위 말해 ‘상태 체크’를 한 것일 뿐이다. 신뢰도 높은 의견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을 해가는 과정들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하나의 분석 결과와 작품을 냈을 때 거기에 내가, 그리고 그녀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도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키운다.






 이런 맥락으로 생각하면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찾는 건 나다운 행위 내지는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에 지나지 않을까 한다. 그마저도 아니게 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게 되는 걸지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은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 그리고 '혹시 치우치면 바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물론 언제나 정도(正道)를 걸을 수는 없다. 때론 샛길로 치우쳐서 혼꾸녕이 나 보기도 하고 상처 받고 하면서 나다움을 찾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반성을 통해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돌아오면 된다. 그러니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어도 괜찮다. 억지로 짜내고 짜내도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그때 일어서서 다시 걸으면 된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해도 괜찮다. 계속 나를 돌아보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된다. 그리고 자기반성을 통해 나다운 것,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을 찾으면 그만이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아직도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나도 있으니까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혹시 주춤하고 있다면 자극이 되길 바란다. 물론 위로와 함께.




결국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닐까.



 응, 그게 맞다. 그러면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던, 나뿐이었던, 나쁜 아이인 나도 하나하나 가지치기를 해가면서 더 나를 나답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라는 작품을 완성해 가야겠다. 그 동생에게 해줄 말이 생겼다. 어서 연락이 닿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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