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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Sep 25. 2020

생전 처음으로 커피 찌꺼기를 말렸다.

딴짓을 하기로 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다가 뭔가  해보겠다고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던 날이 있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집중도 잘 안 되는 날이기도 했다. 선물 받은 핸드그라인더에 그와 함께 받은 질 좋은 원두를 넣고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끼익,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드르륵드르륵, 끼익, 드르륵드르륵, 끼익, 하는 소리가 마치 한동안 놀아주지 않았다며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의 귀여운 볼멘소리 같아 순간 피식 웃었던 것 같다. 선물을 받은 시기 초반에나 열심히 내려먹었지, 이래 봬도 은근슬쩍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 시간이 갈수록 귀찮아져서 그냥 카페로 가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남겨져 방치된 입장이라면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대로 드라마틱한 구석이 있어서 제법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원두가 다 갈리고 나면 나는 힘 빠진 소리는 묘한 성취감을 안겨줬다. 기름칠을 해야 하나 싶기는 한데 그냥 원두를 갈 줄만 알지 다른 건 잘 몰라서 괜히 망가뜨릴까 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선물 받을 때 배운 그라인더 분해/조립 방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소위 말하는 ‘집콕’을 성실히 행하다가 생긴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코로나로 인해 몇 번 면접 자리가 취소되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집에 있던 시기이다. 잠깐 이 시기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자면, 작년 말에 뉴욕에서 돌아와서 고된 유학생활로 인해 안 좋아진 몸을 다독이고 나서 이제 슬슬 살길을 찾아볼까 하던 무렵에 뉴욕에서 취업비자 제의가 들어왔다. 이민 변호사도 알아보고 물들어올 때 노를 저으려고 눈 앞에 놓인 노에 손을 따악 올리려는데 야속하게도 그때 코로나가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제법 학군이 센 지역 영어학원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뉴욕행이 취소된 것이 아쉽기는 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타이밍으로 펜데믹이 터지면서 그 학원 원장님 얼굴도 못 보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마땅한 벌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니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마냥 집에서 처질러 자빠져있기 시작한 시기이다.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나가면 다 돈인데 내 통장은 나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만 있다가 뒹굴게 되고, 뒹굴다 보니 게을러지고, 한번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하니 세상만사 다 귀찮고 무기력하고 뭐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매서운 변화의 바람이 마냥 나쁘다고 만은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게으름뱅이인 내가 스스로 커피를 내리게 되었으니까. 어쨌든 움직였으니까!




 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웬만한 음료는 다 좋아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커피를 제일 좋아한다. 별로 대단할 것 없어 뵈는 시커멓게 탄 콩이 무궁무진한 맛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원산지에 따라, 싱글 오리진으로도, 블렌딩에 따라서도 맛이 제각각이다. 특히 블렌딩을 한 커피는 어떤 종류의 원두를 어떤 비율로 섞었는지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른데, 나는 커피의 이런 면이 마치 테트리스 같아 꽤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디 그뿐일까, 우유니 두유니 휘핑크림이니 캐러멜부터 초콜릿까지 이것저것 다 섞어마실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커피만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여하튼 이러한 매력에 빠져 이집저집 온 동네 커피집을 쑤시고 다니면서 열심히 커피 탐방을 즐기던 때가 있었다. 단골로 시작해 나중에는 사적으로 친해지기도 한 바리스타도 몇 명 생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드나들었다. 게다가 독서든 작업이든 일이든 집중이 제일 잘되는 장소가 카페이니(적당한 소음이 필요한 타입이다), 금상첨화, 문답 무용!






 이런 내가 코로나로 인한 기가 막힌 ‘자체 집콕 처분’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이야 이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삶에 제법 적응도 되었고 뭣보다 수입이 생겼으니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지만 그 당시에는 밖에 나갈 수 없는 답답함이 커질 대로 커져 집에서 뒹구는 재미(라고 쓰고 게으름이라고 읽는다)를 이길 정도로 커지게 되었다. 커피는 마시고 싶고, 카페를 갈 수는 있으나 커피 한 잔 값에 손이 떨리고, 당장 커피를 마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 먹자니 앞날이 걱정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결국 본능이 귀찮음을 이겨 직접 커피를 내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식욕은 참 대단하다. 한번 뒹굴기 시작하면서 느끼게 된 '마력'으로 인해 게으름의 절정을 찍으며 해야 할 공부니 뭐니 다 제쳐두고 건어물녀의 길을 걸을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 식욕이라니. 사실 다이어트 때문에 움직인 부분도 다소 있다. 운동 30분 전에 블랙커피를 마시면 운동 효과가 더 좋다나 체지방을 더 많이 태운다나 뭐라나.



 여하튼 도저히 커피만큼은 포기가 안됐던 그 당시의 나는 무거운 엉덩이를 번쩍 들고일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본능의 승리’의 결과물이 뱃속에서 만족스러운 항해를 끝마칠 무렵에 난데없이 ‘미적 향상 욕구’가 샘솟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다이어트에 대한 욕구라 하겠다. 앞서 언급한 내 상황을 보며 살이 안 찔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인생 최고 몸무게를 갱신한 나는 다이어트를 나름대로 한다고 하고는 있었다. 고군분투를 펼치고 있다는 게 더 잘 어울릴듯한 모습 이리라. 다이어트를 주제로 하면 천일야화를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할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에. 어쨌든 남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여자의 두 가지 고민 중 하나, 오오 야속하도다 자연의 섭리여, 바로 셀룰라이트! 왜 여자에게만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한 번 생기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없어지지도 않는 악명 높은 자식이렸다. 나의 ‘미적 향상 욕구’는 ‘다이어트’라는 문제로 시작해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친 알고리즘을 통해 내 머릿속 소우주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던 정보를 끄집어냈다. “커피 찌꺼기와 코코넛 오일을 섞어서 마사지를 하면 셀룰라이트 제거에 효과적이다!” 코코넛 오일을 사야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현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잊어버리고 말이지. 공부도 해야 하는데. 아, 운동도 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커피 찌꺼기를 말리기가 귀찮다, 코코넛 오일이 없다, 나는 운동을 하고 나서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지만 그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이기도 했다. 이미 나는 대충 찢은 종이 포일을 몇 년이 된지도 알 수 없는 퍼런 바탕에 이런저런 꽃무늬가 그려진 촌스러운 쟁반 위에 처억, 하고 깔고는 그 위에 커피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필터를 펼쳐 놓았다. 집 안에서 바람이 그나마 잘 들 것 같은 위치에 쟁반을 내려놓고 이 찌꺼기를 필터에서 떼어낸 다음에 말려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에이, 아무렴 어때, 하며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귀찮음/현실 vs. 욕구 1차전'의 승리는 욕구였다. 나중에 이 녀석이 말리기가 제법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곰팡이다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프라이팬에 볶는 게 훨씬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은 전자레인지를 쓰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프라이팬에 볶아야 한다는 소리다. 하아, 2차전 돌입이구나.


 어느새 나는 프라이팬에 커피 찌꺼기를 옮겨 담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2차전 역시 욕구의 승. 가스레인지를 켜고 레버를 중불로 돌려 스패출라로 휘휘 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자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 타는 거 아닐까. 그러다가 애초에 태워서 나오는 녀석인데 타든 지 말든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마음을 놓았다. 수분 증발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커피 향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갓 볶은 커피의 향이라 하기보다는 약간 오래된 커피 향이다. 이미 한번 내려먹은 커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이제나저제나 커피 향은 좋다. 구수하기도 하고 달달하기도 하면서 살짝 느끼한 듯도 한 것이 다시 한번 테트리스를 떠올리게 했다. 덕지덕지 엉겨있던 찌꺼기들이 부슬부슬 떨어질 때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다시 종이 포일을 무심하게 버억 찢었다. 한참 열이 받은 이 녀석들을 한 김 식힐 심산이었다. 아까 그 촌스러운 쟁반은 플라스틱이라 그 위에 바로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이 녀석들을 올리면 쟁반이 녹든지 안 좋은 성분이 나오든지 뭐 하나는 할 것 같아 주로 오븐에 구운 빵을 식히거나 빵에 초콜릿 코팅을 하거나 할 때 쓰이는 베이킹용 철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호사는 누릴 수 없는 상황. 냄비를 보관하는 수납장 구석에서 석쇠를 찾아 자랑스럽게 촤악 펼쳐놓고는 그 위에 종이 포일을 살포시 올린 다음에 말린 커피 찌꺼기를 깔았다. 도구가 없으면 대체품을 찾고 만들어내면 된다. 솟아나라 창의성이여!


 빨리 식으라고 살살 펴 발라둔 커피 찌꺼기를 보며 뿌듯해한 것도 잠시, 이내 나는 심심해졌다. 원래부터 심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의 시발점이 귀찮음/현실의 컬래버레이션과 욕구의 은밀한 접전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기저에 깔려있던 상태는 ‘심심함’이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단시간에 급격히 늘어나면서 시간이라는 황금 같은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거기에 코로나로 인해 벌어진 현실에 길까지 잃었으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현실도피로 게으름을 선택했던 것도 있겠다. 어떻게 보면 그저 늘어져있기 바빴던 프로 게으름뱅이인 나를 움직인 원동력은 ‘심심함’이렸다. 거기에 ‘욕구’로 양념을 쳤으니 안 움직이고 배길쏘냐. 자금난은 서비스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갖고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지당한 말씀. 그러나 때때로 꿈이라는 녀석은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거부감이 드는 경우도 있달까. 능동적으로 살아야 하지만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말 같아 어떻게 해야 능동적이 되는지 감이 안 잡히기도 한다. 단지 뭔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능동적인 것은 아니다. 열심은 능동이 보여주는 한 가지 양상이니까. 그날의 나는 분명 능동적이었다. 돈을 아끼면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로 시작해서 셀룰라이트 제거라는 꿈을 향해 꽤나 열심히 움직였다. 책상머리에 들러붙어 앉아서 하기 싫은 공부를 하겠다고 어거지를 쓰는 것보다 훨씬 상쾌하고 은근히 성취감도 있는 것이 묘하게 기분이 좋다. 기분이 한결 좋아지니 공부도 하고 싶어 져 한편에 미뤄둔 책을 꺼냈다. 운동도 당연히!

 어쩌면 삶의 원동력은 그리 어렵고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꿈처럼 거창한 것이든  소박한 심심함이든 상관없을지도. 다만 그 무엇인가가 분노나 복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결국 자신을 갉아먹게 될 테니 좋지만은 않으리라.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일로 승화시켜 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건 연식과 내공이 더 쌓여야 가능할 것 같다.

 요즘 세상은 꿈이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꿈이 있어도 이상하게 꼬인 자본주의에 짓눌려 그 날개를 펼칠 생각도 못하게 한다. 오죽하면 ‘내 꿈의 가격은 9천만 원이다(주- 드라마[인간 수업])라는 드라마 대사가 나올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순간의 딴짓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말 매정하고 야박한 세상이다. 그러면서 창의성을 길러야 하네 자기 계발을 해야 하네, 애들 세상 어른들 세상 할 것 없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딴짓이 창의성을 키울 수도 있을 텐데. 적어도 내 삶을 뒤돌아보면 그렇다. 커피 찌꺼기의 날도 그랬고.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잠깐 놀다가 와도 좋다. 딴짓, 그까짓 거 좀 하면 어떤가 돌아오면 된다. 돌이키려 해도 스스로 깨달음이 없으면 돌이킬 수가 없다. 안 하던 짓 해도 괜찮다. 뭘 해봤어야 아, 이건 아니구나, 나는 이렇구나, 하고 깨닫던가 말던가 할 수 있고 별것도 아닌 것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안 하던 커피 찌꺼기 말리는 짓을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그 찌꺼기 하나로 일장연설을 해대며 오랜만에 글을 쓰는 일도 생겼지 않은가. 그렇게 해야 할 공부 제쳐두고 딴짓을 한 뒤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뤄두던 공부부터 해서 글쓰기 공부와 운동까지 끝냈다. 딴짓도 얼마든지 생산적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방황도 제법 의미 있는 행위이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돌아올 때가 언제인지는 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간간이 딴짓 좀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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