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 못된 아들
내 삶의 이야기를 씀에 있어 아버지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우선 내 아버지는 그리 '살뜰한'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살뜰한 아버지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아버지를 그 존재만으로 사랑한다.
아버지의 가장 큰 특징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가족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모든 조력을 다해주셨지만,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이는 내가 본 우리 할아버지 평생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 무관심이 어린 아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디를 갔던 기억은 어렴풋이 나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놀거나, 안기거나, 업혔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회사일로 몇 년간 주말에만 집에 오시던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기다리던 기대는 실망으로, 거듭된 실망은 냉소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만나면 많이 기쁜 척했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물론 내가 평생 기억하는 사랑도 있다.
초등학교 소풍날이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회식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셨다.
‘내 소풍을 기억이나 하시겠어?’.
난 미리 심술이 나있었다.
그리 맞이한 아침. 일어나 보니 내 책상 위에는 용돈이 놓여 있었다.
또 한 번은 벌에 쏘여 울며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퉁퉁 부어오르고, 통증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 손을 잡으시더니, 입으로 독을 빼내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제 괜찮다"라고, 딱 그 한마디만 하셨다. 말하지 않아도, 안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는 당신 방식대로 늘 곁에 계셨다.그럼에도 유약한 내게는 더 따듯한 아버지가 필요했고, 나는 슬퍼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성격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나에게는 '피난처'가 된다. 어머니가 내 '비혼' 선언에 그토록 가슴 아파하며 갈등의 중심에 서 계신 것과 달리, 아버지는 지금도 내게 연애나 결혼을 꼬치꼬치 묻지 않으신다. 홀로 사는 아들에 대해 별 불만이 없어 보이신다. 그저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식이다.
사실, 나는 이 지점에서 큰 깨달음과 마주한다.
나는 아버지처럼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아버지를 닮았음을 안다.
아버지는 매우 충실한 사회인이자, 가족을 위해 청춘을 희생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고작 '살갑지 못함' 하나로, 자식은 그것을 응어리로 두고 산다. 이렇듯 최선을 다해도 다른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인간은 상처 주고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것에 다름없다. 그런데 나도 그런 사람이다. 나 역시 본질적으로 남에게 큰 관심이 없고, 작은 것에 온 마음을 내어주지 못한다.
말 없던 아버지.
새벽에 용돈을 놓고 가시던 아버지.
나를 안아주지 않았던 아버지.
입으로 벌 독을 빼주시던 아버지.
모두 내가 감당한 아버지, 혹은 내가 감당해야 할 나다.
아버지처럼 살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도, 상처를 받는 인간이란 존재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물론 내 유전자에 새겨진 이 '살갑지 못함'의 숙명을 극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극복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삶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임을 나는 알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