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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Oct 09. 2023

20세기 최첨단 놀이터, 비디오대여점을 애착하다

킴스 비디오(Kim's Video, 2022)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층, 아니 20세기 시절 청년들에겐 비디오대여점이 동네 놀이터였다. 이런 추억을 소환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마치 보물상자 같았어요.
‘킴스 비디오'에 들어가면
금광에 들어가는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킴스 비디오. 이 대여점은 뉴욕에서 한 때 번성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남자 미스터 킴(한국 이름 김용만)이 차렸던 이 가게에는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드니로, 코엔 형제 같은 유명인들을 고객으로 둘 만큼 딴 곳에선 볼 수 없는 희귀한 비디오가 가득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중화되며 이 사업은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8년에 결국 킴스 비디오는 폐업한다. 한 때 직원들을 해외 영화제까지 보내서 희귀한 영화들을 수집해 오던 저력을 자랑하던 곳이었지만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영화 전성시대를 견디진 못했다.


그런데 이 가게에 애착을 가지던 고객들이 꽤 많았나 보다. 고객이자 영화감독인 두 감독,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빈은 킴스 비디오 운영자인 용만 킴과 수많은 비디오들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가게 폐업기, 그리고 사라진 고대 유물인 비디오 추적기가 마치 추리소설 같은 이 다큐 영화 줄거리다. 두 고객은 왜 이토록 옛 비디오대여점의 탄생과 소멸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했을까.




영화에 '접촉'하던
80-90년 세대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80-90년대엔 집에서 영화를 보려면 약간의 노동이 필요했다. 두 발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동네 비디오대여점까지 나가서 마치 서점에서 책 고르듯 구미에 당기는 작품을 내가 직접 골라야 했다.


 과정에서는 선택장애를 극복할 만한 약간의 용기와 상상력 필요했다. 비디오 케이스에 적힌 제목과 대략적인 소개 문구를 보고 그날그날  직감과 기분에 따라 손에 잡히는 데로 작품을 골랐다. 요즘처럼 최신 리뷰나 평점 같은  의존하는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망작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만약 대여점 주인과 안면을 트며  친해지면 직접 대화하며 요즘 인기 많은 작품을 추천받을  있었다.


이렇게 발품을 팔며 영화를 선택하는 건 하나의 온전한 경험이다. 영화가 담긴 물리 매체를 두 손으로 쥐어보고, 이에 대해 누군가와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작품을 선택하기까지 잠깐이라도 내 기분과 생각을 스치듯 점검할 기회가 된다.




영화를 '경험'한다는 건



이렇게 오감과 정신 에너지를 약간이라도 활용하며 신체 노동까지 동원해야 하는 비디오 선택 과정은 오늘날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 화면을 클릭하면 바로 첫 장면이 튀어나오는 영화 보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미지의 이야기에 다가가는 과정은 내가 생각하고, 그날그날 기분을 느끼고, 주변 사람과 접촉하고 반응하는 경험이었다.


이렇듯 영화를 감상한다는 건 '살아있는' 내가 영화에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번거로움을 이겨내며 부족한 정보 만으로 미지의 이야기를 선택하기까지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 영화를 '경험'했다. 대여점에서 신작을 고를 때 느꼈던 기분,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기 전 내 안에 머물렀던 잡념, 친구와 보았건 나 혼자 골방에서 테이프를 재생했건 간에 내가 직접 시간을 들여 의미 있는 선택을 한 경험은 내 무의식 어딘가에 저장된다.


그러다 어떤 감명 깊은 영화를 보면 우린 그 영화도, 그 작품을 선택하기까지 거쳤던 경험도 모두 내 의식에 소중히 저장하고 싶어 한다. 애착(attachment)이란 바로 이렇게 사랑하는 무언가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마음 아닐까.



진짜 경험이 어려운

지금, 디지털 시대



뭔가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건 오늘날 디지털 세상에선 점점 힘들어지는 일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뭔가에 가까이 다가가 느끼고, 생각하고, 대화하는 게 진짜 오감과 정신으로 접촉하는 경험이다. 이렇게 발품을 팔아서 수고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인간은 비로소 뭔가를 애착한다.


과거 킴스 비디오는 이렇게 영화에 접촉하는 경험을 기갈나게 즐길 수 있는 장소였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소장품들을 온전히 되찾아오기까지 몇 년씩 걸리며 과거 충성 고객이 이토록 노력하긴 힘들다. 이 다큐 영화를 만드는 정성 정도면 이 대여점이 영화를 한 때 사랑해던 과거 추억을 간직한 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된다.


하지만 이젠 영화를 온라인상에서 유통할 수 있는 시대다. 비단 영화 보기 뿐이겠는가. 여행을 가는 것도, 맛집을 가보는 것도, 우리는 디지털화된 정보를 통해 사전 체험을 해보길 원한다. 선택 실패, 시간 낭비, 이런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영상물을 보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재생시간이 긴 콘텐츠는 클릭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지고 쇼츠까지 등장한 시대다. 무엇이든 내게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지 않으면 바로 재생을 멈추고 차단할 수 있는 지금, 온전하게 뭔가를 경험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점점 어려워져만 간다.


이 다큐 영화는 인간이 진짜 좋아하는 걸 경험한다는 게, 아니 애착한다는 게 뭔지를 보여준다. 비록 바다 건너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사연이지만 영화 보기와 만들기를 좋아했던 한 한국 이민자가 이윤을 따지지 않고 좋아하는 건 하고야 마는 배짱과 똘끼를 갖고 씨네필들을 어떻게 열광시켰는지, 그리고 아날로그 매체로 영화를 즐기던 시절에 한국 땅에 살았던 청년들 또한 어떻게 영화를 즐겼는지 일깨워주는 기막힌 사연을 보여준다. 그 시절, 영화에 진짜 '접촉'했던 젊은이들의 추억을 소환하며.


이 영화 제작기는 관련 뉴스GV 영상에서 접할 수 있다. 이 링크들 말고도 요즘 개봉 시기에 맞추어 킴스 비디오 운영자였던 용만 킴 님께서 여러 매체와 활발히 인터뷰하신 듯하다. 20세기 비디오 세대를 살았던 모든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즐기길 바라며.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關心)_Kino Psycho] 2023.10.09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cIfNeWB1Lb5jh4coGAa8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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