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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Aug 23. 2024

두 지성(知性)이 보여주는 토론의 품격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Freud's Last Session,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여름, 가장 기다렸던 영화였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어떤 모습일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쓰레기 같은 팝콘 영화 광고 사이에서  포스터를 보자마자 개봉일을 기억해 두었다. 전공이 심리학이어서.. 혼자 이렇게 살짝 들떠 있었다. 또한 아래 책을 읽었던 젊은  기억 때문에 ,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대한 내용도 궁금했다.


그녀가 하버드에서 한 한기 강의한 내용을 옮긴 책이다(하나의학사)


'아버지가 천재인데 딸마저 당대를 풍미한 학자라니. 저 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옛날에 이 책을 읽어봤던 이유는 순전히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나름 아등바등 성취를 하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20대 시절 내 관심사가 아마도 이 책을 샀던 행동에 투사되었으리라. 아직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없는 젊은이로서 앞으로 먹고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불안이 컸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엔 새삼 안나 프로이트도 아버지만큼 꽤나 위대해 보였다.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를 이어 아동 정신분석학 기틀을 다졌다. 표지 사진은 그녀가 중장년 때 찍은 거니 영화 속 배역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다만 아래 사진을 보면 나름 동시대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을 이 영화에서도 잘 고증했다는 생각이 든다.

 

위 책 안에 삽입된 사진 / 프로이드가 친구 즈바이크에게 쓴 편지에서 딸 안나를 ‘나의 안티고네(Antigone)’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있다.


안티고네(Antigone)라니. 프로이트가 안나에 대해 이런 비유를 쓸 정도로 부녀 사이는 각별했다. 안티고네는 서로 맺어지면 안 되는 인연이 합쳐져 탄생한 생명이다. 딸 안나에 대해 아버지가 이런 언급을 할 때는 학자로서의 괴로움이 참 크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정신분석 치료자가 되려면 반드시 자기 분석을 먼저 해야 한다. 무릇 심리치료란 자기의 몸과 정신을 분석 도구로 활용해야 하는 잔인한 학문이다. 남을 치료하기 전 우선 치열한 자기 분석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해야 타인에게도 적절한 개입을 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다른 분야도 아니고 정신분석 전공자로서 부녀 지간에 서로를 탐구하는 작업을 평생 함께 한다는 건 참 괴로운 작업이었으리라.


두 사람은 가족으로서, 학자로서 일생 동안 서로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를 보여주는 몇몇 상징적인 장면들도 나온다. 구강기적 갈등을 암시하는 건지, 하필이면 구강암에 걸린 프로이트가 오직 딸에게만 입 안 부위를 만지도록 하거나 시가를 입에 물고 피워대는 모습, 아비를 위해 모르핀을 구하러 안나가 거리를 헤매는 모습,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딸이 곁에 없으니 안달이 나는 프로이트, 딸이 아버지에게 정신분석을 받으며 추동(drive)을 암시하는 꿈을 고백하는 순간.. 학자로선 감내해야 하지만 둘 다 인간으로선 참 못할 짓이다 싶었다.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막상 베일에 가려진 커튼을 젖히는 기분으로 관람하니 기대했던 바와 영화 내용은 좀 차이가 있었다. 새삼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대립이니 하는 홍보 문구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이 영화는 당대 두 지성인이 가진 품격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이다. 세계관과 인간성에 대해 서로 반대 입장을 가지면서도 토론에서 얼마나 상대를 경청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비록 영화 속 설정은 가상의 상황이지만 두 인물이 보여주는 깊이 있는 대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흐뭇해진다.


무릇 학자라면 안다. 이론이란 게 오류와 한계가 있음을. 그렇기에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두 학자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일련의 대화를 나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해야 할까? 마치 두 사람은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질문을 거듭하며 오히려 학자로서 자신을 더더욱 성찰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공감과 존경을 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학자란 개인적 삶의 경험을 재료로 이론을 만드는 법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중 PTSD를 겪으며 신의 존재를 확신했던 옥스퍼드 교수 루이스(C. S. Lewis), 히틀러라는 악마가 세계를 지배한 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프로이트. 그러니 이들이 각자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확고한 관점을 갖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두 입장 모두 그럴싸해 보인다.


다만 이 영화에서 토론은 학자 개인의 내적 고뇌를 엿보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그래서 심리학 콘텐츠를 평소 접해온 사람이라면 토론 깊이가 얕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흥미를 돋우기 위해 프로이트 이론에서 언급하는 개념들이 군데군데 나오긴 한다. 말실수농담이 개인 무의식을 암시한다는 언급, 심리성적이론(psychosexual theory)에 입각해서 "성경은 성에 대한 우화집이에요."라고 논평하는 모습, 동네 약국 직원이 프로이트를 일컬어 아래처럼 반문하는 장면.


 섹스 박사?
(The sex doc?)


영화는 꽤 재미있다. '둘이 주구장창 토론만 해대면 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시간이 갈수록 대사를 음미하며 말맛을 느낄 수 있다. 굳이 깊이 있는 지식이 없더라도 「나니아 연대기」를 쓴 루이스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프로이트를 연기 장인 앤서니 홉킨스가 어떻게 연기했을까?’ 정도의 관심만으로도 극장에서 볼만하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노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내뿜는 관록은 빛을 발한다. 발성은 더욱 쩌렁쩌렁해지고 몸짓은 실제 시한부 환자 자체니, 그저 감탄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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