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폴에서의 20일(20 Days in Mariupol, 2023)
전쟁은 마치 엑스레이 같다.
인간 내면의 민낯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나는 내레이션이었다. 전쟁이 끔찍한 이유를 설명하는 단 한 문장.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며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은 동물로 전락하는 과정이 이 다큐 영화에 드러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다는 궁금증 때문에 영화표를 끊었다. 이런 잔인한 호기심은 구경꾼이 가질 만한 야만적인 본성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새삼 이런 생각이 들며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지고,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진다.
그런가 보다. 상황이 끔찍해질수록 남을 도우려는 사람은 더욱 주변을 챙기고, 먼저 살아남으려는 사람은 쉽게 도둑놈이 되는 건가.
이 다큐 영화는 AP통신 기자가 목숨을 걸고 취재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록이다. 전략적 요충지이자 항구 도시인 마리우폴을 차지하고자 러시아 연방에서는 주요 거점 시설을 공격한다. 아파트, 대학, 방송국, 쇼핑몰, 병원, 소방서까지.
영화라기 보단 기록물에 가까운 이 작품은 가짜 뉴스에 맞서 진실을 알렸다는 점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20일간 마리우폴에서 체류하며 취재한 AP통신 기자는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필사적으로 인터넷과 위성 전화가 통하는 지점을 찾아 헤매며 영상 기록을 전송한다. 적십자 차량에 어렵게 탑승한 후 검문소를 15개나 지나며 차 바닥에 숨겨온 촬영 기록은 세계에서 뉴스화되었다.
전쟁은 결국 위에 있는 자들이 외치는 선동으로 점화된다. 현재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다. 제 3자 입장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판단하는 건 무의미하다. 우크라이나에겐 러시아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일테고, 러시아 입장에서 반대로 생각해 봐도 우크라이나는 섬멸해야 할 적일 테니.
다만 최악의 피해를 입는 자는 항상 민간인이다. 누가 적이고 우방이든 이 사실은 변함없다.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기, 학생, 노인, 여자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카키색으로 변한 갓난아기 시체를, 주인 품에 안겨 온몸을 부르르 떠는 반려견을, 친구와 축구를 하다 목숨을 잃은 16살 소년을... 차마 지켜보기 힘들다.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응급실 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한다.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시체들을 화면에서 목도하면 말을 잃게 된다. 21세기판 홀로코스트라고 해야 할까.
러시아는 자기네가 공식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기록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쟁은 인간성을 어떻게 말살할까. 갓난아기부터 청소년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민간인이 무참히 생명을 잃는 장면도 지켜보기 힘들지만, 불과 2-3주 내에 문명사회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는 과정도 지켜보자면 슬프다.
어떤 부인은 외친다. 쇼핑몰에서 장사를 해오던 그녀는 폭격당한 점포 앞에서 통곡하다가 버젓이 면전에서 약탈을 일삼는 시민을 향해 분노한다. 어떻게 그리 뻔뻔하게 공을 가져가냐고. 공은 장난감이지 생필품은 아니지 않냐고. 하지만 질서가 무너진 틈을 타 일부는 야만인으로 변한다. ATM 기기를 깨 부수고 슈퍼 물건을 버젓이 훔쳐가는 모습은 내 안에도 살아 숨 쉴지 모르는 이기심을 부끄럽게 보여준다.
마리우폴은 2-3주 만에 폐허로 변했다. 러시아는 민간인들을 노리고 전략적으로 도시 거점을 파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이에 대해 가짜 뉴스라고 반박한다. 전문 연기자들이 이런 희생자로 분장해서 가짜 장면을 연출한 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라는 거짓 선동에 대항하기 위해 참혹한 진실을 알리고자 이 작품을 완성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기반 시설이 파괴되니 외국과 통신이 두절되어 현 상황이 어떤지도 그들로선 알 길이 없었다. 정보를 못 얻고 미래를 전망할 수 없다는 건 그들에게 가장 큰 공포였다.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을 때 감독은 영화제 역사상 가장 슬픈 소감을 남겼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은 영화제 33관왕을 달성하고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우크라이나가 평화를 되찾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감독이 전하는 말에 담겨있다.
https://youtu.be/SN_ArrwkU9U?feature=shared
불행히도 우크라이나는 전후 재건이 어려워 보인다. 이 영화는 한국에선 너무 늦게 개봉했다. 마리우폴 함락 직전, 2022년 3월 즈음에 취재했던 기록만 봐도 벌써 도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비단 이 도시뿐일까?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인 지역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외국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 인도적 지원을 해 줘야 할 텐데 우크라이나인에게 이런 장밋빛 상상은 국제 정세를 거스르는 희망 고문이다. 트럼프가 당선을 한 마당에 세계 경찰국가인 미국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외교를 펼칠 게 분명하다.
여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며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한국이 6.25 전쟁 후 현 위치까지 발전한 게 새삼스레 기적 같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세계에 우크라이나 상황을 알리려 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본다. 마치 우리가 일제강점기 시절 고종이 일본 몰래 헤이그 특사를 은밀히 파견했던 절박함이 아닐까. 한국은 세계 경제발전 기류를 타서 노동력을 갈아 넣으며 운 좋게 성장했지만 현 세계정세는 과거와 다르다. 신자유주의 극우 세력이 많은 국가에서 집권하고 거시 경제는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원조가 필요한 나라에 대해 국제적 지원은 더더욱 인색해지리라.
아마도 팝콘을 사들고 상영관에 들어가면 제대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끔찍한 장면이 많다. 94분 동안 온몸이 경직되어 두 눈을 화면에 고정해야 하리라. 영화가 끝나면 거리를 점령한 러시아군 탱크에 스프레이로 새겨진 'Z'라는 글자는 관객 머릿속에 선명한 잔상으로 남으리라.
"사유는 경험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겠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전쟁이란 게 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두 눈으로 봐야 안다. 거대한 구덩이에 쌓인 민간인 시체들을 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걸.
특히 용산 돼지와 성형괴물 관종녀 부부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정신 차려야 한다. 전쟁은 까딱하는 사이에 현실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실 쪽에서 알아야 할 텐데 한국 상황도 암담하다. 그동안 용산 부부가 저지른 공천 비리, 주가 조작, 무속에 기댄 기행 등을 지켜보자면 트럼프는 그래도 제정신이 박힌 정상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시한부 권력을 손에 쥐려고 한 줌도 안 되는 친미 반공 극우세력을 선동하고자 북한을 자극하는 짓거리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