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바다 갈매기는(The Land of Morning Calm,2024)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밀만큼 개인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염세주의 철학자 키에르키고르가 했던 말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머리를 스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인간은 비밀을 품을 수 있어서 비로소 고유해지도 모른다. 비밀이란 남과 나눌 수 없는 나만의 진실이다. 비밀을 간직할 수 있기에 키에르키고르는 인간을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위대하다고 했다. 그렇다. 종교가 있건 없건 오로지 절대자 앞에서만 보여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그게 비밀이다.
영화란 어쩌면 누군가의 비밀을 벗겨보는 신비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간직할 만한 비밀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내 얘기일 수도 있다. 인생이란 무대를 바다라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기상예보 따윈 소용없이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을 죽을 때까지 견뎌내야 하는 어부일지도 모른다. 자비라고는 없는 바다 아래에서 뭔가를 건져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 그게 사람일 테다.
그래서 영화 주인공이 마치 내가 된 것 같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속을 다 보이지는 않고 사는 아주 일상적인 우리네 모습 말이다. 남에게 이해받지 못할 만한 그 무엇이라도 우린 아주 쉽게 침묵 속에 가두지 않는가. 굳이 말을 해도 오히려 오해를 만들기보단 입을 다무는 게 차라리 나으니까.
늙은 선장 '영국(배우 윤주상 역)'와 선원 '용수(박종환 역)'이 간직한 비밀은 뭘까. 용수 엄마인 '판례(양희경 역)'에게도, 용수의 베트남인 아내 '영란(카작 역)'에게도 말할 수 없다. 비밀을 간직하는 게 옳으냐 그르냐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이들은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을 했다.
어촌 마을에 사는 이들은 거의 노인이다. 일렁이는 바다를 타며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대다 보니 다들 말도 행동도 거칠다. 굳이 기나긴 말로 대거리를 안 해도 서로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안다. 여긴 어제는 오늘과 비슷했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건 없는 곳이다. 소멸해 가는 지방 도시, 늙어가는 사람들, 젊은 노동력을 외국에서 수급해야 하는 척박한 환경. 마치 지금 대한민국 축소판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잖아요.
희망이란 게 보이지 않는 땅에서 어떤 사람은 용수처럼 개척자가 된다. 인생을 바꾸려면 불안과 공포를 감당해야 하는 법. 아내도, 어머니도 받아들이기 힘든 소망을 간직한 이 젊은이를 영국은 이해한다. 그래서 둘이 간직한 비밀은 영글어간다. 거친 파도에 방패처럼 맞선 조개껍데기 속 진주처럼, 그 비밀은 둘에겐 희망이 되었다.
어촌 사람들끼리는 서로 너무 잘 아는데도 소통은 어렵다. 다들 눈 감고도 잘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말도 행동도 살면 살 수록 드세졌다. 어디서든 다들 돈 냄새를 맡으면 눈이 머는 걸까. 알만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돌변하고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폭력이 완연해진다. 말속에 뼈가 있는 농담은 외국인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나라에서 주는 보상금을 콩고물 만치라도 타먹어 보려 위선을 보이는 이들도 생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들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 지방 소멸, 고령화, 다문화 가족에 대한 편견, 외국인에 대한 차별. 모두 생각해 볼 꺼리다.
영화는 말한다. 사는 게 팍팍한 세상일수록 인간은 제 눈에 안경 식으로 좀 더 넓게 조망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영수는 엄마와 아내에게 진심을 전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가족도 아닌 영국은 그 마음을 알았다. 가족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족끼리, 친지끼리 아무리 친하더라도 눈앞에 기회와 공포가 동시에 놓여있을 때 어떻게 돌변할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니. 살면 살 수록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걸 우린 너무 잘 알지 않는가.
분위기는 점점 끓어오른다. 비밀을 간직한 인물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조바심 내며 지켜보자니 이게 바로 현실 스릴러다. 영수가 무거운 비밀을 터놓고 영국에게 의지하면서 여러 상황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영수는 정신줄을 놓고 어촌 현실이라는 그물줄에 걸려 바닷속 제물로 침몰하기보단 어떤 진지한 탈출을 택했다. 영국은 영수를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고자 했는지, 도대체 어떤 사연을 살아왔기에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자고 이토록 애를 써주는지 영화에선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굳이 세세한 전말을 알 필요 없이 그가 마을 어른으로서 한 젊은이가 가진 비밀을 지켜주는 심정은 관객에게도 전해진다.
왜냐하면 배우들이 그야말로 연기 차력쇼를 펼치기 때문이다. 이들을 재발견했다고 칭찬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 주·조연, 엑스트라 할 것 없이 카메라 한 번을 비출 때 다들 여기에서 어떤 꼬라지로 사는 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연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풍기는 표정이 살아있다. 웅크린 등짝에선 피곤이 묻어난다. 마치 등이 말을 하는 듯하다. 비릿한 생선 냄새가 베인 작업복을 입고 바삐 일하는 어부 역 배우들의 몸짓엔 활력이 배어 있다. 이들이 내뿜는 목청은 걸걸하고 힘차다. 그동안 연기랍시고 진짜 연기하는 티가 풀풀 나는 스타 배우들이 양산형 블록버스터에서 절절대며 곱디고운 음성으로 발음을 뭉개고 삽질을 해대는 걸 지켜보기 답답했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 단연코 추천한다. 모든 인물들은 극 중 현실을 제대로 살고 있다.
봤냐!??
.. 봤지!! 그럼!!
됐네! 그럼!
긴 말이 필요 없다. 아는 사이에선 말이다. 대사가 이토록 짧으니 이게 바로 현실이다. 주고받는 푸닥거리들을 지켜보자면 속이 시원하다. 진짜 긴 말 필요 없다. 요즘 개봉하는 한국 영화 중 이토록 재미있는 스릴러-블랙 코미디 장르가 있던가.
상영관을 나오며 찬 겨울바람 속에서 목구멍을 달굴 만큼 뜨거운 칼국수가 당겼다. 여기에다 매운 마늘 냄새가 베인 겉절이와 초록색 병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그만이겠다. 그만큼 영화는 짜고 쓰고 맵다. 그 맛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쾌감을 준다. 다들 진짜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내는 듯 연기해서다. 그들이 배를 띄우는 터전, 출렁이는 바다와 갈매기가 멀미 나듯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래, 나도 이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살아야지" 하며 쓰디쓴 술 한 잔에, 뜨거운 국물 한 숟갈에, 김치 한 젓가락에 목을 축이며 하루하루 버티는 거겠지. 삶이라는 풍랑이 언젠가는 평온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