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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Jun 19. 2024

초록의 시간 782 수줍은 소년

모퉁이 아빠청년

아침이면 자주 만나는

엘베 소년이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꼭 버튼 앞 모서리에 서서

얼굴을 바짝 박고 있어요


낯가림이 심한 수줍은 소년 같아서

먼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어요

안녕? 두 글자로 시작한 아침인사가

한두 마디 점점 늘어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는

학교 잘 다녀와~ 

손까지 흔들게 되었죠


여전히 버튼 앞 모서리가

수줍은 소년의 지정석이지만

그 소년도 푹 수그린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빙긋 웃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목례 하거나

소리가 나는 듯 마는 듯

혼잣말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아침 길에서 가끔 만나는

모퉁이 아빠청년도 있어요

수줍은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면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며 웃습니다


아빠청년도 길 모퉁이에 서 있어요

애기띠를 하고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데

손으로는 큰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또 한 손에는 어린이집 용품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묵직한 가방 하나 둘러매고

쑥스러운 듯 서성거립니다


아빠청년의 손에 잡혀 있는 큰아이도

수줍은 아이인지 아빠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려고 까치발을 하면

아빠청년이 큰아이를 번쩍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귀를 대어주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수줍은 소년이 자라면

모퉁이 아빠청년이 될 것 같아요

넝쿨장미는 이미 시들어

바스락 소리라도 날 것처럼

말라가고 있는데 뭐 볼 게 있다고

담장에 붙어 서 있는 걸까요


아빠청년이 늘 담장 모퉁이에 서서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다가도

그에게 매달린 건 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게 됩니다


예전 서양에서는

양배추밭에서 남자아기를

장미밭에서 여자아기를 데려온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사내아기에게는 푸른 옷

여자아기에게는 분홍옷을 입혔다고 해요


남자니까 당연히

활발하고 씩씩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푸른 옷의 편견나 역시 갇혀

아침에 만나는 수줍은 엘베 소년과

길모퉁이 아빠청년을

안쓰럽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생각합니다


커다란 나무뿌리 옆에 수줍고 쑥스러운 듯

납작 엎드려 피어난 한 송이 보라 수국이

수줍은 엘베 소년 같아 보이고

길모퉁이 아빠청년 같기도 해서

한참을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중얼~


소년도 수줍을 수 있고

아빠청년도 쑥스러울 수 있죠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남자 여자이기 이전에

사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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