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85 다이어리를 준비하며
길 위에서
다꾸족이 아니라
다이어리를 아기자기 꾸며가면서
제대로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처럼
해가 바뀔 무렵이면
새 다이어리를 준비합니다
마음만 서너 걸음 앞서가며
책을 읽지도 않을 거면서
책을 사고 '겨울방학' 북커버에
'길 위에서' 펜마크까지 사는 것도
비슷한 습관인 듯합니다
참 쓸모없는 습관이긴 하지만
마음의 준비라고나 할까요
학생시절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책상 위부터 깨끗이 정리하고
내친김에 서랍 정리까지
말끔히 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무척이나 진지합니다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고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다이어리를 찾았습니다
다이어리는 새것처럼 비어 있었으나
그 안에서 예쁜 편지를 찾았으니
뜻밖에 즐거운 득템입니다
친구님의 편지 구절이
정겹고 따사롭습니다
~이제 우리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따스이 위로해 주고
더 편안히 기대기로 해요~
편지를 다시 읽다 보니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바스락 낙엽들이 떠올랐어요
바닥에서 이리저리
우르르 굴러다니는 낙엽들도
커다란 마대자루에 구겨져 담겨 있는
소리도 없고 보이지 않는 낙엽들도
그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차디찬 겨울을 견디는 모습이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낙엽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는데
그 곁에 서 있는 내 그림자는
다만 혼자였으니
홀가분하면서도 왠지
문득 쓸쓸~
나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내 곁을 온전히 내주며
맘껏 기대어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다가
그민 웃고 말았죠
가만 생각해 보면
함께 있어도 혼자인 듯
따로 또 같이
여럿 안에서도 언제나
늘 혼자인 느낌이었습니다
여섯 남매의 맏이였는데도
동생들을 업어 준 기억도 없고
함께 다정히 놀아준 기억도 없어서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혼자 책 읽고 그림 그리며
내 맘껏 상상하고 노는 게
훌훌 자유롭고
편하고 졸았어요
엄마는 어린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어려서부터 혼자인 게 습관이 되어
혼자 있는 게 편하고
혼자 노는 게 편하고
혼자 상상하는 게 좋았습니다
일부러 목소리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되고
애써 웃지 않아도 되는
내 맘대로의 시간이 좋았거든요
그러는 사이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덥석 안기는 법도
익히지 못했어요
생각해 보면 울 엄마도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하셔서
올망졸망 아이들을
다정히 보듬어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셨어요
엄마 역시 엄마 노릇이 처음이라
서툰 엄마였을지도 모르죠
살며시 기대는 법을
배워가는 겨울입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내가 기대면 그 어깨가
나로 인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되어
오히려 힘이 된다는 것을~
서로의 짐이 아니라
서로의 날개가 되어
소리도 없이 팔락이며
함께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