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동지라서
동지팥죽 사러 갔다가
황금빛 치자 열매를 만났습니다
명절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동지는 낮이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하루하루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므로
해의 부활이라는 생각에
작은설이라고도 한다죠
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동지팥죽 한 그릇 뚝딱 먹으며
나이도 한 살 뚝딱 더 먹고
붉은 빛깔 팥의 힘을 빌어
나쁜 기운도 물리쳐야겠어요
작년에는 애기동지여서
건너뛰었으니 이번엔 제대로
한 그릇 챙겨 먹어야죠
그래서 시장에 갔습니다
가까운 죽전문점도 있으나
국산 팥이라고 떡하니 써 붙인
시장 할머니 가게의 팥죽이
달지도 않고 괜찮거든요
솜씨도 없고 할 줄도 모르니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먹어보고
어느 가게 무엇이 내게 잘 맞는지
정해 두고 대충 해결하는 게
꽝손의 생존 비법인 셈입니다
죽집에서 죽 한 그릇 포장하는데
바로 옆 가게 앞에 내어놓은
치자열매가 한 바구니가 눈에 들어와
신기한 마음으로 들여다보았어요
치자꽃은 해맑은 하양인데
꽃향기는 달콤함이 진하고
밝고 선명한 주홍빛 열매는
꼭 다문 입술 모양으로 야무집니다
단무지 등에 식용 색소로 쓰여
황금빛 물을 들일 수 있으니
귀한 꽃이고 열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붉은 동지팥죽과
노랑 치자 열매의 만남이
뜬금없으면서도 반갑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꽃다운 시절 울 엄마가
치자꽃을 좋아하시던 생각이 났거든요
작은 화분에서 피어난 치자꽃
하얀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울 엄마는 총명하고 젊고 외롭고
치자 열매처럼 말이 없으셨죠
동지팥죽을 포장하고는
근처 옷가게에서
이제는 젊지 않으나 여전히 외롭고
치자 열매보다 더 굳게 입을 닫으신
엄마를 위해 꽃무늬 고운
포근 덧신도 하나 샀습니다
동지 풍습 중 하나가
웃어른의 장수를 기원하며
버선을 만들어드리는 것이라는데
바느질 솜씨도 없는 꽝손이니
아쉽지만 덧신으로 대신합니다
동지팥죽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치자열매처럼 야무지고 쓸모 있게
치자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치자빛처럼 고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살아야겠어요
굳게 마음먹는다고
마음대로 살아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이라도 단단히 먹어야 그나마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딛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