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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Dec 21. 2024

초록의 시간 892 꽃다운 시절

치자꽃 향기

오늘이 동지라서

동지팥죽 사러 갔다가

황금빛 치자 열매를 만났습니다


명절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동지는 낮이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하루하루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므로

해의 부활이라는 생각에

작은설이라고도 한다죠


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동지팥죽 한 그릇 뚝딱 먹으며

나이도 한 살 뚝딱 더 먹고

붉은 빛깔 팥의 힘을 빌어

나쁜 기운도 물리쳐야겠어요

작년에는 애기동지여서

건너뛰었으니 이번엔 제대로

한 그릇 챙겨 먹어야죠


그래서 시장에 갔습니다

가까죽전문점도 있으나

국산 팥이라고 떡하니 써 붙인

시장 할머니 가게의 팥죽이

달지도 않고 괜찮거든요


솜씨도 없고 할 줄도 모르니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먹어보고

어느 가게 무엇이 내게 잘 맞는지

정해 두고 대충 해결하는 

꽝손생존 비법인 셈입니다


죽집에서 죽 그릇 포장하는데

바로 옆 가게 앞에 내어놓은

치자열매가 바구니가 눈에 들어와

신기한 마음으로 들여다보았어요


치자꽃은 해맑은 하양인데

꽃향기는 달콤함이 진하고

밝고 선명한 주홍빛 열매는

꼭 다문 입술 모양으로 야무집니다

단무지 등에 식용 색소로 쓰여

황금빛 물을 들일 수 있으니

귀한 꽃이고 열매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붉은 동지팥죽과

노랑 치자 열매의 만남이

뜬금없으면서도 반갑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꽃다운 시절 엄마가

치자꽃을 좋아하시던 생각이 났거든요

작은 화분에서 피어난 치자꽃

하얀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울 엄마는 총명하고 젊고 외롭고

치자 열매처럼 말이 없으셨죠


동지팥죽을 포장하고는

근처 옷가게에서

이제는 젊지 않으나 여전히 외롭고

치자 열매보다 더 굳게 입을 닫으신

엄마를 위해 꽃무늬 고운

포근 덧신도 하나 샀습니다


동지 풍습 중 하나가

웃어른의 장수를 기원하며

버선을 만들어드리는 것이라는데

바느질 솜씨도 없는 꽝손이니

아쉽지만 덧신으로 대신합니다


동지팥죽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치자열매처럼 야무지고 쓸모 있게

치자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치자빛처럼 고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살아야겠어요


굳게 마음먹는다고

마음대로 살아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이라도 단단히 먹어야 그나마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딛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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