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6.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전체 교직원 연수가 있어 선생님들은 전부 영어실에 모여 강의를 듣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에 가기 전과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혼이 나간 표정으로 전화를 하시는 선배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배님 아들은 단원고에 재학 중이었다. 뉴스 검색을 하신 몇몇 분이 속보를 전해주셨다.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수학여행 떠난 단원고 학생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제자 중에 단원고로 진학한 제자가 많다는 말 끝에 급하게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가시는 선생님도 계셨다. 영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강사님은 강의를 시작하셔야 했지만 그 날 강의를 끝까지 제대로 하시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봤다. 화면 가득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배가 나왔다.
'아니, 배가 저렇게 떠 있는데 왜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하나?'
우리 가족들은 생중계로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저럴 때 기적처럼 해결사가 나타나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던데 이제 그때가 되지 않았나? 곧 '모두 구조되었다'는 오보가 진짜라고 다시 속보가 뜨지 않을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뉴스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첫 사망자는 단원고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우리 반 아이가 다니던 검도학원의 형이었다. 우진이는 그 형의 사망 이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전 국민이 다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사고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이 죽었다. 아이는 말을 잃을 정도로 슬퍼했다.
학교 앞 슈퍼가 문을 닫았다. 셔터가 내려간 가게에 우리 학교 꼬맹이들이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슈퍼 아주머니의 아들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적었다. 얼마 후 아주머니가 시신으로 떠오른 아들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들은 다시 슈퍼 셔터에 편안히 잠들라는 쪽지를 남겼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뉴스에도 방영이 되었고, 우리 반 여자 아이가 인터뷰를 했다. 슈퍼는 다른 분에게 넘어간 후에야 다시 문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나는 출근길에 자주 울었다.
안산 IC에 들어서는 시간에 묘지로 향하는 운구차량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는 출근길에 운구차량들을 만났다. 운전 중인데도 눈물이 너무 흘러 눈을 감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탕탕 치고 싶었다. 꽃 같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 묘지로 향하는 길은 너무 슬펐다. 마음속으로 아이들의 평안을 빌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스러진 생명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편의 지인인 생존자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 무서웠다.
평소 체격이 좋고 힘이 좋은 아들이었다. 아이는 배가 급격히 기울자 본능적으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붙들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때 어떤 녀석이 이 아이의 발을 붙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 애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발이 붙들린 아이는 전처럼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발로 차고 때려보아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 이를 악물고 그 녀석을 끌어올려 업고 함께 탈출했다. 그렇게 아들은 친구의 목숨을 구하고 자기 목숨도 구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이의 꿈속에서 매일 밤 재생되고 있었다. 친구를 발로 차 떨어뜨리려 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죄책감도 올라왔다.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아들의 공황상태를 지켜보며 괴로워하고 계셨다.
유치원에 다니던 우리 아이가 내게 물었다. 단원고 선생님이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양보하고 아이들에게 내려갔다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본 후였다.
"엄마, 엄마도 수학여행 갔다가 저렇게 사고 나면 학생들이랑 있을 거야? 집에 안 와?"
선생님인 엄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는 것을 아이가 생각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대답이 금방 나온 나에게도 놀랐다.
"응, 엄마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구명조끼 양보했을 것 같아. 그리고, 학생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면 옆에 있어줬을 거야."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대답은 했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지막 순간 생각날 아이의 얼굴을 다시 한번 눈에 담으며 눈물을 삼켰던 기억까지.
2014년 안산에 있었던 기억은 다시 떠올리는 것이 겁이 날 정도로 슬프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