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해야 하는 일인 건 알지만, 굳이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가장 앞에 있다. 손에 쥔 것들이 너무 창피하고 내뱉는 모든 말들이 어떻게 들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시 뒤로 돌아가다 원래 자리를 되찾길 수차례, 현수는 결국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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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은 아직 까만색이 아닌 붉은 빛을 띠고 있지만 현수는 방은 아직 조금 남은 햇살의 시간을 거부하듯 하나밖에 없는 창문에 커튼을 단단하게 쳐두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에는 햇빛 대신 빔프로젝터에서 출력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프로젝터가 놓인 책상에는 두툼한 소시지와 새빨간 볶음면이 커다란 접시에 함께 담겨 있다. 얼핏 보아도 절반은 남아있는 모양새였지만, 아쉽게도 접시 옆에는 비어버린 맥주캔만 곧 쓰러질 듯 힘없이 놓여 있었다.
‘빨리 가서 사 올까.’
현수는 상영 중인 영화를 멈추고 시간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5분 거리에 있는 마트는 문을 닫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고, 현수는 아직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민이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듯, 잠시 고민하던 현수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큰마음 먹고 특별한 안주를 꺼내든 만큼 오늘은 완벽한 저녁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날, 맥주가 부족한 사태는 매우 큰 문제였다. 소중한 비빔면이 붇지 않기를 바라며 빠르게 방문을 나섰다.
3층 계단을 내려가 빌라의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현관문 앞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현수에게 집중된다. 평소에는 노래를 틀어두고 떠드는 하는 정도이더니 오늘은 아예 춤을 추고 있다. 심지어 못 보던 흑인들도 보인다. 최근에 이사하는 소리가 나더니 저 사람들이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맥주병을 들고, 어떤 사람은 담배까지 손가락에 끼우고는 오늘도 현관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명 인사가 되어가고 있다.
현수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에서 놀던가, 아니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좀 놀든가 하면 좋으련만 꼭 이렇게 현관 앞에서 늘 파티를 벌인다. 기골이 장대한 백인에 흑인까지 섞여서 흥에 오른 무리는 아주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조용히 혼술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도 얌전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현수에게 이런 소란스러운 파티는 가히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붉은빛이 드는 하늘은 이 소란에 광기마저 씌운 듯 보였다. 그 커다란 폭력에 현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현관을 지나다니며 그들을 한 번씩 노려보는 정도였다. 불편한 소란에 대한 작지만 꾸준한 항의의 표시였다.
조금 힘겹긴 했지만, 오늘의 특별한 안주와 함께 계획한 혼술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저녁 11시 30분, 현수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웅 오빠, 나 아까 일어났어.”
“일찍 일어났네? 한국은 6시 30분 아니야 지금?”
“맞아. 눈은 떴는데 더 자고 싶어 흐엉.”
“난 이제 잘 건데!”
“너 이따가 일어날 때 보자.”
현수가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 지혜와 투닥거리며 전화를 이어갔다.
“아, 오늘 불닭볶음면 먹는다며. 잘 먹었어?”
“방금 다 먹었어. 오랜만에 먹으니까 피가 도는 것 같아. 맥주도 계속 들어가더라.”
“와 독일 맥주에 불닭볶음면은 진짜 맛있겠다.”
“완전 맛있지. 아, 중간에 마트만 안 갔으면 완벽했는데, 오늘은 걔네 막 춤까지 추고 난리 났어.”
“오빠 한국 올 때까지 계속 그럴 거라니까. 이제 2주밖에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 나 이제 출근해야 해. 오빠도 얼른 자.”
“알겠어. 일어나서 연락할게. 사랑해.”
지혜의 말마따나 그들의 파티는 현수가 이곳을 떠나는 2주 뒤까지 이어졌다. 그동안에도 현수의 작은 항의는 계속되었지만, 가랑비에 결국 옷은 젖지 않았다.
그렇게 2개월 동안 이어진 긴 출장의 마지막 날, 현수의 마지막 출근을 핑계 삼은 회식이 있었다. 출장 기간동안 출장지 직원들의 추천으로 온갖 맛집을 다녀봤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식당이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온갖 고기 요리와 해시브라운, 소시지, 감자튀김까지 눈부터 즐거운 테이블에서는 독일 특유의 무겁지만 경쾌한 향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 모든 음식을 아우르는 맥주까지 있으니, 독일에서의 마지막 레스토랑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마지막 회식은 아쉽게도 짧게 끝나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나 일찍 집으로 향했다. 주말에 비행기를 타려면 짐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퇴근길의 하늘은 이제서야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일몰도 마지막이구나 싶던 순간, 현수는 문득 이 무렵에 항상 벌어지던 숙소 현관 앞의 소란이 떠올랐다. 이 아름다움을 보며 그런 불쾌함이 떠오르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개월의 출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억이지만, 그런 불쾌함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가장 답답한 점은, 이 시간에 집에 가면 분명 그 소란은 오늘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오늘만 참자. 내일 한국 가니까 오늘만….’
숙소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오늘도 노랫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속이 분노로 가득하다 해도 저 폭력스러운 소란 안에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던 현수는 평소에 항상 하던 작은 항의도 생략한 채 현관문을 지나 집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마지막 퇴근을 마치려던 찰나였다.
‘엥…? 어디 갔지?’
급하게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본 현수는, 숙소의 문을 열어줄 열쇠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식의 취기가 순식간에 가시면서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차례로 하나씩 떠올렸다. 이 숙소는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기 때문에 밖에 나갈 땐 늘 열쇠를 챙겨야 했다. 그래서 항상 열쇠를 문 앞 부엌 선반에 두고 나갈 때마다 챙기고 외출했다.
‘오늘도 분명 열쇠를 챙겨서 가방에 넣고….’
열쇠가 있어야 할 가방엔 작은 포크가 들어있었다. 오늘따라 일어나기가 싫더라니, 비몽사몽하던 아침이 이런 사단을 만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