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들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은 사실, 예민한 그에게 굉장히 귀하다. 보통 잠들지 않으면 안되는 밤보다는 모든 의무감과 강박이 사라진 한 낮의 자연스러움의 연쇄 반응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깨어난 후에 그 음악은,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그의 혈액 속에 흐르고 고유한 기운을 형성하는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마치 그 곡 작곡가의 영혼을 일부 흡수한 듯, 음료에 비타민 가루를 털어넣은 듯 그는 사뭇 다른 자아가 되어 또다른 살아있는 눈빛으로 깨어난다. (사람의 자아가 매 순간 순간 바뀐다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그 음악을 들었던 순간은 그리워하게 된다. 본인도 모르게 왜곡하여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리운 명곡을 편곡하듯 다소 애틋한 마음으로 그 실체 없는 순간을 회상한다. 사실 지나간 과거들이 이제 와서 실체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쟁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 기억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타인을 설득하려 하는 게 아니라 떠올리고 미소를 머금은 소박한 축복을 위한거니까.
이런 이야기는 어느 날 평화로이 눈 뜬, 오전이라기엔 조금 애매한, 정오에 거의 다다른 시점에 인공지능으로부터 날아온 "이 순간에 정확히 들어맞는 추천곡"처럼 머릿속에 등장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로 영향력을 미쳤던 한 꾸러미의 노스탤지어는 미래로 확장하며 영속성을 갖게 된다. 마음 속의 빈 방들의 썰렁함을 사소히, 뜨뜻히 채워내는 힘과 글이 된다. 아름다운 추억은 앞날의 예기치 못한 응원이자 마라톤 속의 물 한잔이 된다. 한번 마시지 않는다고 쓰러지지 않지만, 고개를 조금 더 들쳐내 높이, 멀리 세상을 향한 눈빛을 쏘아낼 수 있는 춤사위가 된다.
청년에게는 당장 끓어오르는 화학작용과 같은 사랑과 고통이 없으니 민들레 홀씨와 같이 떠다니는 상념들이 시로 거듭나지는 않지만,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극의 톱니바퀴, 예민하게 조각된 그 맞물리는 지점들이 조금 더 유려하고 날카롭지 않게 변해간 것 뿐이다. 대중이 말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완만한 언덕과 같은 다가옴에도 가슴을 채워내는 능력을 얻어가는 길 위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 잔잔한 호수와 슴슴히 부는 매일 밤 언저리의 찬바람도, 빼어나게 깊고 쉬이 무뎌지는, 한 편의 모험 있는 자외선으로 닿지 못한 라일락 빛의 자극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