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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Mar 21. 2022

2453년을 살아남은 비극

에우리피데스 - 「메데이아」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아손: 가장 소중한 아이들아.
메데이아: 엄마에게도, 네놈에겐 아니지만.
이아손: 그럼에도 죽였나?
메데이아: 너에게 고통을 주려고.”

- 「메데이아」 중


이 책에는 「알케스티스」, 「메데이아」, 「힙포뤼토스」 3개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메데이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메데이아란 캐릭터 자체의 매력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기원전 431년에 쓰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보적인 여성상이다.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캐릭터인데, 그런 강건한 성정은 독자로 하여금 자꾸만 응원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줄거리는 남편 이아손의 불륜을 둘러싸고 이어지는 메데이아의 복수이다. 초반부에서 남편 이아손은 가족의 안위 핑계를 대며 코린토스 왕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메데이아에게 선언한다. 심지어 코린토스의 왕은 메데이아가 무슨 악행을 가할지 모르니 메데이아를 추방시키겠다고까지 한다. 이 말을 들은 메데이아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좌절은 잠시뿐, 곧바로 이아손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 궁리한다. 이 부분에서 메데이아의 매력이 두드러진다. 상처를 받았을 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응전하는 그 모습이 독자가 더욱 그 복수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데이아는 머리띠에 독약을 묻혀 이아손의 불륜 상대를 죽인 뒤, 자신의 아이들까지 죽이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메데이아의 선택은 독자들에게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아손은 어떻게 아이까지 죽일 수 있냐며 메데이아를 비난하기도 한다.


“이아손: 너도 고통받을 것이다. 내 불행을 나누었으니. (…) 결혼 때문에 살해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냐?”


재혼을 위해 아이까지 추방하려 했던 이아손의 태도는 아이의 죽음을 직면한 뒤에야 이렇게 뒤바뀐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이아손의 불행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이제 남은 삶에서 그 고통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 이아손뿐만이 아닌 건 분명하다. 메데이아 역시 아이를 잃은 거대한 슬픔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메데이아가 아이들의 시체를 안전한 곳에 묻기 위해 뱀 수레를 타고 떠나는 장면으로 비극은 끝이 난다. 이 비극은 메데이아를 끝까지 강직한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이처럼 모성애나 사랑 때문에 좌절하는 전통적 여성상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로 행동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메데이아>는 상당히 진보적으로 느껴진다. 기원전 431년에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서사가 있었다는 게 놀랐고, 그 서사가 2022년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마치 현대 치정극의 원조를 보는 것만 같다.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대화 사이에 삽입되어있는 코러스는 극을 해설하거나 등장인물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형식적인 완성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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