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실 - 『영의 자리』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물다섯 해보다 지난 다섯 해를 더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파쇄해갔다.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구부러져 0이 되었다.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한 주인공은 실업급여 수급이 끝난 뒤 이제껏 쌓아온 경력과는 무관한 곳에 취직한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다가 발견한 곳, 바로 플라워약국에. 그 약국의 약사는 면접을 보러온 주인공에게 대뜸 말한다.
"유령이 또 왔네."
이 책에는 유령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살아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들은 살아있으면서도 생을 상실한 채 유령이 되었을까? 약국에서 일하는 또 다른 유령 '조'는 과거에 가게를 운영했으나 빚을 진 채 망해버렸다. 그때 낯빛이라도 밝으면 장사가 잘될까 싶어서 시작했던 화장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그 역시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었으나, 그간 이뤄온 것을 상실한 채 이전과는 무관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과 '조'가 일하는 약국은 영의 자리다. 완전한 1이 되지 못한 채 0 근처만 맴도는 이들이 모여든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전의 삶과는 멀어진 유'령'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렇지만 '영'이 가진 의미가 오직 그뿐일까. '영'의 또 다른 의미는 소설 말미에 다다라 드러난다.
"영등포의 '영'은 원래 '꽃부리 영'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그윽한 풍류가 있다고 해서 붙은 한자였다. 예쁜 마을은 이윽고 신령이 머무는 마을이 되었다. '영등'은 바람을 관장하는 신령인 영등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영등날에서 유래했다. 언 땅이 녹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농한기의 마지막 명절이 영등날이었다. 신령이 머무는 마을은 다시 충신의 마을이 되었다. 멀리 왕성이 보이는 재가 있다고 해서 '길 영'을 쓰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왕도 없고 재가 있던 자리에는 역이 들어갔다. 영등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리지 않고 굿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풍경은 소멸하고 이름으로만 희미한 흔적을 남겼다."
영등포에 위치한 플라워 약국은 영등포의 옛날 의미를 되살린 약국이었는지도 모른다. 플라워약국이 영의 옛 뜻인 '꽃부리 영'의 의미를 되살린 이름이니 말이다. 그러니 과거를 상실한 것만 같은 이들이 모여드는 플라워약국은, 유령들이 회복하기 위해 꼭 거쳐 가야 하는 단계였던 것 아닐까. 주인공은 플라워약국의 이름 뜻을 알게 된 후 새로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 회사 역시 예전 회사처럼 녹록지 않은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령으로부터 회복한 경험만으로도 주인공은 예전처럼 쉽게 생을 상실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