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ckypinkpiggy Apr 30. 2022

재검토하지 않은 과거는 정체성의 상실을 부른다

말콤 글래드웰​ - 『어떤 선택의 재검토​』​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었다. 역시 말콤 글래드웰이다.  2차 세계대전의 마침표를 찍었던 일본 내 민간인 학살이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맹신이 어떻게 기존의 목적을 지우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약 10년 전에 읽었던 <아웃라이어> 때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여전히 뛰어난 글솜씨다.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일본 내 민간인 학살을 결정하게 된 계기를 맹신도들의 사례와 겹쳐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확신이 현실에 부딪혔을 때 진정한 신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일련의 믿음에 많은 것을 투자할수록, 그러니까 그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몰두한다."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재검토하지 않은 과거는 정체성의 상실을 부른다. 구원받고 싶어 믿기 시작한 종교에 매몰될수록 틀린 증거를 갖다가 그 종교의 신뢰도를 높이려고 한다. 르메이도 똑같았다. 공군이 전쟁에서 주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르메이는 공군이 무능함을 드러내자 민간인을 포격해서라도 그 쓸모를 증명하려 했다. 전쟁 물자 생산 시설 포격에 실패한 전투기를 데려다가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67곳의 도시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전략폭격조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도쿄 화재로 6시간 동안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날 밤 10만명이 죽었다." 


우리는 르메이의 선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르메이 덕분에 전쟁이 빨리 끝났다는 말은 사건의 핵심을 보여주지 못한다. 민간인들을 전쟁 동조자로 보는 그릇된 시각으로 인해 르메이는 최단 시간에 최대 학살을 범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군인이 아닌 죄도 의무도 없는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전투의 목적이 종전보다 최대 살상으로 기울 때 그 전투는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 (...) 군사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주제다 보니 어쩐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태엽 감는 새>가 생각난다. <태엽 감는 새>엔 참전 군인과 핵폭탄에 피폭된 인물이 등장한다. 하루키는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이 현대 일본에 어떤 허무감을 안겼는지 주목한다. (물론 전범 국가인 일본이 자국의 피해를 강조하는 게 다른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근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생각해볼 거리가 많긴 하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논지와 동일선상에 놓고 보자면 결국 일본의 민간인들도 명백한 피해자가 맞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민간인을 포격한다는 건 군인으로서의 지위를 버리는 것과도 같다. 이는 군인이 아니라 살인마가 하는 일이기 떄문이다. 르메이의 폭격으로 불탄 67곳의 도시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은 전쟁의 트라우마와 허무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살인마의 승리였지 군인의 승리가 아니었다. 


전쟁의 목적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러시아의 한 군인이 아내로부터 우크라이나 여성을 성폭행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이제 군인과 군인의 가족이 아니다. 성범죄자와 성범죄 조장자일 뿐이다. 전쟁에서 윤리를 따지는 일만큼 허무한 일도 없겠지만, 역사는 이전의 잘못을 재검토하며 나아가야 한다. 어차피 전쟁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전쟁에서조차 윤리를 따지는 그 허무한 일을 계속할 때에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진실을 다루는 태도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