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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May 26. 2020

원래부터 '적'과 '나'는 닮아 있었다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① - 삶 즉 고통

"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적'과 '나'는 본성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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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링크)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링크)

 

Ecce Homo - Martin Schongauer (c. 1480)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작곡가이자 사상가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 라이프치히 1813 ~ 이탈리아, 베니스 1883)의 음악극 파르지팔(Parsifal)은 그 말년의 대작이다.


극적 얼개의 표면에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암포르타스의 고통이다. 
 
쿤드리의 유혹에 빠진 암포르타스는 성창(聖槍)을 잃고, 마법사 클링조어가 휘두른 그 성창에 찔린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은 이 사건을 시/공간적 중심에 놓고 엮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표면적인 흐름 속에서는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 조차도 성배왕의 고통을 순수한 바보가 없애주리라는 예언 아래 묶여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이 의문은 <파르지팔>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에 주어진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풀리지는 않을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로써 <파르지팔>이 담고 있는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누가 또 고통받고 있는가?
 
 
 (2) 고통의 전시장 
 
무엇보다도 쿤드리를 보라. 구세주를 비웃은 죄로 영겁 속에서 무수한 생을 거듭살며 속죄를 위해 구세주를 찾아 세상을 헤메봐도 환상 속에서 다시 만난 구세주를 거듭 비웃어야만 하는 저주가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자, 자신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자 즉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자에게 내민 손이 그들을 파멸시키는 순간 쿤드리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다만 거친 한숨을 몰아쉰다. "저 암포르타스도 강하지 못했어, 모두가 ... 너무도 약했어! 나처럼 모두들 내게 내린 저주로 몰락하고 마는구나! (Schwach auch er! Schwach.. alle! Meinem Fluche mit mir alle verfallen!)" 

좌: 쿤드리, 베를린 슈타츠 오퍼, 아이힝어 연출/ 중: Kundry:Olive Fremstad / 우:  Gawein und der verwundete Ritter

1막과 2막의 쿤드리가 자신의 상반된 모습을 다른 상태에서도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연출 상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떤 해석에 따르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물약과 지칠줄 모르는 노고에 감사를 표하려는 암포르타스를 바라보는 것만큼 원인제공자 쿤드리에게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사람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구원을 바라며 내미는 나의 손이 언제나 저주받은 유혹으로 해석된다면.
 
 KUNDRY
 (unruhig und heftig am Boden sich bewegend) (땅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초조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Nicht Dank! Haha! Was wird es helfen? 고마워하지 말아요! 하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담? 
 Nicht Dank! Fort, fort! Ins Bad! 고마워하지 말아요! 어서, 어서! 몸을 씻어요!
 
 
그런 쿤드리를 지배하는 클링조어는 어쩌면 고통에서 자유롭지는 않을까? 아니, 이 클링조어의 절규를 들어보라. "이 끔찍한 괴로움이여! (Furchtbare Not!)" 
그는 돈 지오반니 혹은 이아고 같은 확신범이 아니다. 이교도 출신인 그를 경멸하고 모욕했던 성배기사단은 끝내 그에게 속죄도, 성스러운 것으로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성배와 성창을 향한 그의 염원(Sehnen)과 갈구(Drang)는 차츰차츰 그를 지배하는 고통의 굴레가 되어 원치 않았던 악역을 떠맡긴다. 클링조르의 요새와 성배기사단의 성이 대칭되듯 닮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적'과 '나'는 본성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견 클링조어의 대척점에 서있는 듯 보이는 성배기사단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내용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듯 해골로(렌호프 연출) 혹은 굳어버린 석조상(아이힝어 연출)으로 등장하는 선왕 티투렐의 현재 모습에서 성배와 성창을 하사받을 때의 성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 명령문으로만 존재하는 이념체계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이념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참담함이 아닐까.
 

구르네만츠, 베를린 슈타츠 오퍼, 아이힝어 연출

성기사 구르네만츠도 벌써 1막부터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지혜로운 그라지만 그 지혜도 본질적 고통의 문제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헛된 기대와 노력을 뒤로 하고 세월은 흘러 언제나 정정할 것만 같았던 그도 선왕 티투렐을 앗아간 죽음 만을 기다리는 늙은 은둔자가 되었다(3막), 더 이상 희망을 품을 능력을 상실한 채 가실 일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등까지 구부정해진 늙은이는 그런 자신을 알아보는 파르지팔에게 자조적으로 말한다. 
 
 GURNEMANZ
 So kennst auch du mir noch? 날 아직도 알아본단 말이오?
 Erkennst mich wieder, 이런 나를,
 den Gram und Not so tief gebeugt? 깊은 근심과 걱정만큼이나 구부정해져버린 이런 나를?
 
  

성배기사단과 암포르타스, 베를린 슈타츠 오퍼, 아이힝어 연출

 
성배기사들도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오래전에 잊은 듯 성배의 빛으로 연명하는데 급급하다. 1막의 행진곡풍 합창은 언뜻 그저 건전하게만 울려퍼지는 듯 싶다. 그러나 그 노래가 더욱 '건전하게 울려 퍼질 수록' 일말의 의심도 섞여있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더욱 심화된다. 폭력과 장조의 만남은 오히려 역겹고 메스꺼운 느낌을 자아내어야 할 것이다 - 마치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에서 폭력적 장면과 오버랩되어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지고 이를 강제로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알렉스(말콤 맥도웰 분) 그리고 이를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연구자들의 관계처럼, 환호하는 기사들의 중심에는 그들의 요구로 자기 의지에 반해 성배의 덮개를 벗겨내고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는 암포르타스가 있다.
 
 
 

암포르타스와 그의 심장, 베를린 슈타츠 오퍼, 아이힝어 연출


(베를린 슈타츠 오퍼에 새로 오른 아이힝어의 연출에서 성배는 바로 암포르타스의 심장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폭력으로 고통받는 대지 혹은 지구로 치환되었다.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에 동 공연에 대한 짧은 평을 달아 놓았다.)
  
 

그런데 성배기사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마치 사냥꾼들에 둘려싸여 구석에 몰린 '상처입은' 들짐승의 난폭함과 같다. 혹은 화생방실을 가득채운 지독히 매운 가스에 눈물콧물을 흘리다 옆사람을 밀치며 출구로 뛰쳐나가는 N번 훈련병의 무분별함과도 같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폭력이다. 집단과 제도에 의해 행사되기에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들이 움켜쥐는 지푸라기 바로 그것이다. 쿤드리를 의심하고 괴롭히는 기사들의 모습도(1막)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피해를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가슴 속의 고통'(Herzeleide)라는 이름을 지녔던 파르지팔의 어머니, 뱃속의 자식을 보지 못하고 추적자들에 살해당하는 그의 아버지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파르지팔 자신의 고통, 그리고 '더럽혀진 손'에 의해 신음하는 '성스러움=구세주=성배와 성창'의 고통에 대해서는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에서 적어본다.)
 
 
한밤의 꿈 속에 나오는 수많은 타인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어떤 식으로든 꿈꾸는 내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그래서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섬뜩했던 적은 혹시 없는지? 예술가의 백일몽으로서의 예술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 역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품은 생각과 이미지 곧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이 세계가 모순에 가득찬 불완전한 것으로 비친다고 해도 그 이미지 자체는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실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투란도트>, 게르기에프 지휘, 마린스키극장-바덴바덴페스티벌


글쓴이는 마린스키극장-바덴바덴페스티벌 공동연출의 <투란도트>를 보고서야 비로소 푸치니가 동 작품의 모든 인물을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의 관점에서 파악해 인간에 있어 욕망의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투란도트>는 '욕망의 전시장' 혹은 '욕망의 자연주의적 실험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와 비교해 볼 때 '고통의 전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파르지팔>에서 각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입고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각각의 인물들에서 '암포르타스'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리고 이 때의 '일반명사로서의' 암포르타스는 불특정의 인간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로서의 인간을 보편적으로 표상한다.
 
과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를 뿌렸던 성창은 다시 암포르타스를 찌른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암포르타스는 이를 통해 인간을 '대표해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치료는 물론, 그를 잊게 해주는 환상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이러한 고통이란 바로 존재의 고통, 어드덧 나서 어느덧 죽어야 하는 삶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원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든지 끊어내지 못한 인연의 끈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후자를 더욱 분명하게 따져보아, 쇼펜하우어에 있어 어떻게 고대 인도 베다의 가르침이 낭만적 허무주의로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때의 고통이란 무목적적 의지가 개별자들에게 강요하는 '살라! 욕망하라! 서로서로 물어 뜯으라!' 라는 명령에 우리가 복종하는 데에서 온다고 보든지. 이 삶의 고통 자체는 하지만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계속)


3편으로 이루어진 "파르지팔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연재 글은 

모두 2005년에 작성했던 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당시 사용했던 표현 일부를 고치며, 약간의 내용과 사진을 추가하였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오래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찾아 읽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표현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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