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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Jun 17. 2020

구원이란 스스로 자신의 짐을 내려놓는 것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③

-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에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진다. (스피노자)

- 가장 쓰디쓴 숙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의 시작이다. (니체)

- 그러한 삶 속의 깨달음과 변화야말로 갈기갈기 찢겼으나 죽음을 딛고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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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목차
 
1.   고통 (링크)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링크)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 보살행(mit-leiden)
 
3.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3.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만일 이야기를 <파르지팔> 작품 자체에 국한해야 한다면, 이 세 번째 글은 쓰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출발점은 지난 9월 11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후 재개관을 기념해 열린 <파르지팔> 공연의 리뷰를 부탁받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연주회장에서 솟아난 무수한 상념들을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어느 가수가 노래를 잘했더라 하는 식의 글을 쓰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념들을 잠정적으로라도 정리해 보려니 그 무게에 눌려 글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한 달이 훨씬 지나버렸다. 결국 지난 주말에야 겨우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야 적자면 필자는 "구세주에게 구원을! (Erlösung dem Erlöser!)"이라는 말로 끝나는 <파르지팔>에서 자율성(Autonomie)의 문제를 떠올렸다. 자율성의 문제라는 말은 달리 적자면 어떻게 수동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능동적인 상태 혹은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질문이다.
 
<파르지팔>의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앞의 글에서 본 악극의 모든 인물이 고통받는다고 썼다. 이제 그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고통받는 '구세주=성스러움=성배와 성창'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구원(Erlösung)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묶인 것을 풀어낸다는(lösen) 의미이다. 해원(解寃)이다. 암포르타스를 구원한다는 말에는 그에 부여된 직무(Amt)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준다는 뉘앙스가 있다(관련한 영어권의 논의가 궁금한 분은 링크를 참조). 그렇다면 '구원자'가 짊어진 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구원자 혹은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타율적인 시선 자체가 아닐까? 물론 구원자가 구원을 기다리는 가엾은 이를 귀찮아하거나 부담스러워할 리는 없다. 문제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고통이고 그 근원적인 존재의 고통이 인간의 수동성에서 말미암는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아닌 남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해결방안이 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관련하여 대승불교의 보살행(菩薩行)에 대한 설명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은데, 문외한의 만용이라는 점을 무릅쓰고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열반에 들지 않고 사바세계에 남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요, 살며 살게 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 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구원은 언제나 나에 의한 나의 구원  자율성의 회복이며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잠정적인 결론이 과연 쇼펜하우어 사상에 탐닉했던 바그너, 그리고 그의 <파르지팔>과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이 글에서 우리는 삶은 고해(苦海) 요,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무목적적 의지를 마치 자신의 개별적 욕망 인양 받아들인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고 폭력이 출현하며 결국 모든 개별자는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 그리고 타인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어야 하는 고통 아래에서 괴로워하게 된다'는 세계관을 바그너의 악극과 함께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이다. '타인의 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권리는 끝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세계에서 구원이란 일시적으로는 예술의 도움을 통해, 항구적으로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정관을 통해 저 무 목적적 의지에 봉사하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물론 이로써 고통은 극복된다. 하지만 끝에 찾아오는 정서는 필자가 지금 '구원'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활기찬 기쁨, 무엇인가 새롭고 자유로운 질서를 함께 구성해나가는 즐거움에 비해서는 정(靜)적인 인상을 준다. 
 
 
반면,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homo homini deus)"이라 말한 이들이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 에라스뮈스 그리고 포이어바흐다. 고통받는 자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에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진다. (스피노자) 


- 가장 쓰디쓴 숙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의 시작이다. (니체)


- 그러한 삶 속의 깨달음과 변화야 말로 갈기갈기 찢겼으나 죽음을 딛고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필자가 <파르지팔>을 듣고 보며 쫓아온 생각의 끝은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생각했던 길과는 정반대의 도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런데 바그너 스스로 이와 비견할 만한 생각의 단초를 남겨놓은 흔적이 보인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 (독일어 원문 링크)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 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 순간의 바그너' 그리고 '25년 후 <파르지팔>을 완성하는 바그너' 간에 놓여 있는 것은 단절인가 혹은 연속성인가? 

이 편지에서 바그너는 앞으로 25년 후에나 마무리될 자신의 <파르지팔> 3막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사상이 익어가는 동안 걸리는 시간은 마치 음악 속에서처럼 물리적 세계 속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흐르나 보다.


'동정이냐 사랑이냐’라는 지점에서 이후 니체가 바그너 및 쇼펜하우어와 결별한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흔히 강조되는 그 차이만큼이나 그들을 결별 이후에도 강렬하게 끌어당겼던 것은 바로 그들이 우정이 퇴색된 후에도 함께 붙잡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이것으로 마치자.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필자가 아니라도, 굳이 오늘이 아니라도 어차피 삶에서, 글 밖에서 계속 이어지므로.
  
 이진 (YHEE, Jean)
 


 
 [아래: 짧은 공연평 -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아이힝어 신연출,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바그너 <파르지팔> 9월 11일 공연]

연출자 아이힝어 (좌), 암포르타스, 쿤드리, 구르네만츠 (우)


본 연출에는 쿠퍼의 원숙하고도 심오한 연출을 기억하던 청중과 비평 양자로부터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1막과 3막에서 성배 기사단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를 보자. 성배 곧 심장을 썰어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행진곡을 부르는 아이힝어의 1막 연출은 객석에 큰 충격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또 다른 감독, 렌호프의 연출에서도 이점은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선정주의라고 매도되지 않으려면 그러한 효과적인 요소가 왜 타당한지 극 전체적으로도 일관된 논리가 미적 형식과 균형을 이루면서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이 겨냥하고 있는 고통(혹은 수동성) 폭력의 직접적인 관계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만큼은 평가하고 싶다. 
  

우선 1막의 '시간이 공간으로 되는' 순간을 보자. 진정 성스러운 것 즉 이 지구라는 대지와 그 위에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전쟁과 파괴, 환경오염으로 고통받았던 긴 세월의 편린들은 회전하는 여러 개의 스크린에 나란히 투사되었다. 동시에 나란히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공간'의 주요한 본성이라고 볼 때 적절한 시도였다. 
 

이어 2막 2장에 등장한 파르지팔이 1막과는 다른 십자군 복장을 하고 '이교도'의 땅을 쳐들어 가는 것으로 설정하여 '폭력'의 문제를 연출가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3막에서 폭력의 문제는 현대 도시인에게 그 폭력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 정도로 흔해져 버린 어느 광경을 통해 역설적으로 묘사되었다. 도시인들이 여유롭게 산보하는 뒤쪽의 넓은 무대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썰렁한 노숙자의 잠자리는 철책으로 가로 막혀 있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노숙자에 대한 무관심, '비정상적인 삶'에 대한 경멸이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이 요란하지 않게 부각되었다.
 
이 날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고 평할 것이 없었다. 특히 2막은 숨도 못 쉬고 지나간 듯한 굉장한 연주였다.


 

같은 날 멀지 않은 포츠담 광장의 필하모니 홀에서는 얀손스와 콘체르트 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말러 6번이 연주되었다. 베를린에서 그동안 의외로 만나기 어려웠던 연주와 연주자였기에, 어느 공연을 선택할지 상당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돌아보면, 이날의 연주는 "바렌보임-슈타츠오퍼-바그너"라는 조합 앞에서는 밀린 일도 주머니 사정도 잊어야 한다는 필자 나름의 신조를 재확인해주는 훌륭한 것이었다.
 


건강이 걱정될 만큼 초인적인 일정으로 슈타츠오퍼와 베를린의 문화에 열정을 쏟아 붙는 이 사람이 지휘대에 서는 날이라면 어떻게든 연주회장을 찾아가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끝) 


위 공연평 및 "파르지팔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연재 글은 모두 2005년에 작성했던 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당시 사용했던 표현 일부를 고치며, 약간의 내용과 사진을 추가하였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오래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찾아 읽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표현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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