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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Jun 01. 2020

그 여름

지은은 지난 여름을 떠올렸다.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가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심상과 필요 이상으로  어울려서,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지나치게 집중할  있었다.



기주를 처음   지은은 기주까지 포함해  명의 또래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디자이너인 지은의 친한 회사 선배가 친구들과 놀다가 지은을 부른 자리였다. 기주는 키가 컸고 피부색이 진했으며 프랑켄슈타인처럼 얼굴 골격이 발달해 강인하면서도 다소 우울한 인상을 풍겼다. 그들  거의 말수가 없는 편에 속했고 이따금 지은의 말에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온갖 화제들이 오간 밤이었지만 그들에게 ‘개념녀 코르셋 무슨 뜻인지 설명하느라 열변을 토했던 대목이 지은은 귀갓길 내내 마음에 걸렸다.   기주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지은은 이불 속에서  번이고 몸서리를 쳤다.



다음  지은은 선배에게 물어 기주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오빠,  어제 봤던 지은인데. 친해지고 싶어서 제가 번호 물어봤어요.



오빠라는 단어의 정치적 해방은  같은 애들 때문에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하며 지은은 카톡을 썼다. 어젯밤 기주가 입고 있던 얇고 목이 적당히 파인  티를 떠올리며 답장을 기다렸다. 답장은  시간 후에 왔다.



-안녕하세요. 어제 많이 마셨는지 완전 뻗어 있다 지금 일어났어요.



기주는 능숙했다.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친절했으며 이번  일요일 저녁에 뭐하냐며 지은을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 지은은 볼을 꼬집었다.



-저희 쉐프가 후보 메뉴들을   만들어  건데, 사실  타깃인 지은 씨가 와서 신랄하게  평가  해줘요.



기주는    친구들 몇몇과 녹사평에 식당을 개업할 예정이었다. 일요일 4시까지 본인이 마실 술만 들고 오면 된다며 그는 곧이어 집주소를 지은에게 보내줬다.



경리단길 기업은행  버스 정류장에 내려 해방촌 옥탑방에 도착할 때까지 지은은 기주의 티셔츠 핏에 반해 기꺼이  언덕길을 올라온 여자가 자기 말고도 족히 10명은  있을 거란 상상을 하며 걸었다.  여름 해가 천천히 넘어가는 방향을 마주 보며 걷느라 인중에 빽빽히 땀이 맺혔다. 마침내 휘청대는 3 계단까지 올라 기주의 작은 옥상에 들어섰을  마주한 풍경은 지은의 머릿속 그것과 사뭇 달랐다.



옥탑방 바깥에 차려놓은 테이블엔 기주의 동업자 친구  , 인테리어 업자  , 쉐프, 그리고 기주만 앉아 있었다. 이미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느낌이었지만 지은은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괜한 어색함에  기주 오빠랑 엊그제 만난 사이에요- 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인테리어 업자라는 이들은 보광동에 작은 사무실을 차려놓고 일하는 남매였다.   누나라는 사람은 지은의 취향에  맞는 흑갈색 히피펌에 어깨 각이 들어간 린넨의 빈티지 프린팅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빡빡머리의 동생은 누나보다  살은 많아 보였고, 유학 시절 떨을 폈다가 파티의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꿈틀이로 보였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지은은 정말로 이들에게 흥미가 일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이것 저것 물어봤다. 기주는 처음 만난 또래의 사람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지은이 재미있다는  웃었다.  와중에 쉐프가 내어온 감자부리또와 아보카도프라이즈는 지극히 평범한 맛이었고,  와중에도 지은은 진심과 예의를 절반씩 섞어 특유의 성심성의 어린 말투로 피드백을 해주었다.



 시간쯤 지나자 소나기가 내렸다. 인테리어 남매는 동생의 스쿠터 위에 올라 함께 사라졌다. 나머지  사람은 테이블을 대강 정리하고 옥탑방으로 들어왔다.



-누가 이거 밖에 놔뒀어?



쉐프와 친구를 동시에 힐난하는  외치며 기주가 허둥지둥 방으로 들고   PVC 소재로  지은의 클러치였다. 지은은 집주인에게 가방을 넘겨 받으며  웃었다.



- 털어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



소나기인줄 알았던 비는 제법 오래 내렸고 맥주는 각자들 서너 병씩 해치운 상태였다. 쉐프가 김치전을  먹자는 아이디어를 내자, 기주는 김치가 아랫방에 있는데 거기 사는 이와 싸웠기 때문에 지금 내려가긴 곤란하다고 얼버무리며  안을 기각시켰다. 지은은 의아한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이내 다시 자신이 요즘 구독하는 유튜브 콘텐츠 얘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비가 그쳤다.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고 기주가 옥상에 걸어둔 작은 전구들이 빛을 냈다.  사람은 슬리퍼를 끌고 다시 옥상으로 나와 맥주를  병씩  마셨다. 화제는 다시 타투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은의 발등에 있는 타투는 우사단로에 있는 타투샵에서 받은 거였고 쉐프의 팔뚝에 있는  합정 ()이었다. 둘은 각자의 타투이스트들 인스타그램 계정을 서로에게 소개해줬고 기주는 물끄러미 웃으며  모습을 지켜봤다. 지은은 기주의 시선이 느껴지는 모든 순간이 떨렸다.



-오빠들, 쉐프님,  이만 들어가볼게요.



너무 오래 머물렀다 싶어진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주가 택시 잡는 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 일어났다. 다시  쓰러질  휘청대는 옥탑 계단을 나란히 내려와 땅이 발에 닿자, 기주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TMI 한데 실은, 아랫방 사는 사람이  여친이에요. 한창 좋을  같이 살아보려고  집으로 이사를 했거든. 근데 너무 자주 싸워서  힘드네요.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됐는데  전세방  구해서 아직 이러고 있죠, .



-, 그러시구나.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혼잣말에 가깝도록 나지막이 대답했다.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동안 말수도 별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문장을 줄줄이 쏟아내니 놀라울 뿐이었다. 기주한테 마음이 있기야 했지만 명시적으로 고백이라도  적은 없으니 이건  돌려 전하는 거절의 의사도 아니요, 반대로  해보려고 미리 말하는 거라면 더더욱 괴상하다. 기주 말대로 확실히 TMI 하지만  알아두니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는   하겠다. 잠시 생각하다 지은은 속으로 마음 먹었다. 아래 집에  여자친구가 살거나 말거나 지금은 공식적으로 헤어진 상태라니 나는 상관 않고 직진한다. 그런 것쯤이야. 정말로 지은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택시가 소월길을 따라 남산으로 접어들 때쯤 띠링, 하고 지은에게 문자가 왔다.



-[Web발신] 법무법인 가원입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2018드합30 이혼  재산분할 사건 2018. 8. 19. 312 조정실 16:00 참석 바랍니다.



지은은 호르륵, 한숨을 내쉬다 문득 택시  냉방이 춥게 느껴져 가방에서 가디건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그래, 자신 없으면 기주랑  여자처럼 먼저 같이 살아보기라도 하던가 결혼은 뭣하러  이렇게 일찍 했나 몰라. 이젠  타는 일마저 버겁군. 반지 자국이 남아있는 약지를 만지작거리며 지은은 중얼거린다.



- 자리에 타투나 하나  할까.



서른이 목전으로 다가온 여름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들의 시간보다 부지런히 떠나는 청춘의 뒷모습이  앞에 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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