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와 선우
민재와 선우는 3년 된 연인이다. 민재는 서른 두 살, 선우는 스물 아홉 살. 두 사람이 그 누구의 연고지도 아닌 제3의 고향 춘천으로 함께 이사 오기 까지는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 다 이 낯선 도시가 들었기 때문이다. 둘은 같이 살기로 마음 먹었지만, 양쪽 집 안의 재산을 확인해 신금호나 공덕 같은 곳에 적절한 신혼집을 구하고 청첩장을 돌린 뒤 식을 올리는 형태의 부부 생활을 꿈꾸지는 않았다. 각자가 온전히 행복하고 성공적이면서도, 남들의 기준에 끊임없이 맞춰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미래를 원했다. 쉬울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마음이 합쳐져 그렇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 제안은 민재가 먼저 했다. 민재는 서울에서 8년차 대기업 마케터였다. 대학에서 홍보학을 전공했고 언제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민재에게 직장은 알맞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커리어를 오랫동안 지속하다가는 재미없는 중년 여성이 될 것 같았다. 회사의 윗사람들은 하나같이 따분했고 닮고 싶지 않았다. 춘천쯤 되는 어딘가에서 독립 서점을 차리는 것이 제 꿈이에요, 라고 민재는 입버릇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민재는 친구가 많았고 회사 밖 삶에도 몰두하는 유형이었지만, 언제든지 경춘선이든 ITX든 한 시간만 타고 서울까지 와서 필요한 일을 보고 돌아갈 수 있는 도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모아둔 돈도 꽤 된다고 자신했다.
선우에게 이 제안은 좀 더 부담이 적었다. 선우는 갓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등단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작품 활동에는 그게 독이 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어딘가로 훌쩍 떠나 고립된 채로 글을 쓸 수 있다면 등단한 작품보다 더 근사한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재의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해야만 하지만 서울보다 생활비가, 집값이, 덜 드는 걸 생각하면 입에 어찌 저찌 풀칠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외동 아들인 선우에게 부모님은 꽤 든든한 버팀목이어서 여차 하면 마지막에 기댈 곳도 없진 않았다. 그러니 민재와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어디든 선우에게 큰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의암호가 보이는 춘천의 작은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독립 서점의 이름은 <단둘과 저밖>이었다. 서점은 두 사람이 서울에서 알던 이들의 도움으로 채워갔다. 선우가 알고 지냈던 몇몇 작가들의 에세이집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했고, 서점 이름으로 지역에 새로 생긴 카페와 문화 공간 등을 소개하는 소식지를 발간했다. 민재가 후원하던 여성 단체와 녹색당의 서적들을 꽤 큰 서가 한 켠에 큐레이션해두었고 정기적으로 모임이나 세미나도 열었다. 함께 꾸민 집에는 서울에서 친구들이 주말마다 놀러왔다. 그 중 누구도 두 사람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 왜 춘천에 내려와서 사는지 그 자리에서 묻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답은 민재가 서울에서 지인들에게 공유한 퇴사 선언에 전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저녁마다 서점 문을 닫고는 한적한 밤공기를 마시며 공지천을 한 차례 산책한 뒤 퇴근했다. 선우가 몇 달 째 시를 쓰지 못하고 있는 것만 빼면, 완벽히 꿈꾸던 일상이었다.
춘천에서 산 지 6개월쯤 되던 해에, 두 사람의 옆집에는 새로운 이웃이 찾아온다. 혼자 사는 서른 일곱의 영주였다. 자신을 한림대 철학과 시간 강사로 소개한 영주는 생기 넘치는 외모의 발랄한 이웃이었다. 해외에서 사온 콤부차와 공정 무역으로 생산되는 건과일들을 민재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었고 선우의 시를 전부 읽었다며 그 중 닥터 지바고가 나오는 시가 좋았다고 말한다. 민재가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을 땐, 꼭 들러보라며 성수와 한남의 새로 생긴 카페들이나 요즘 주목 받는 전시들을 줄줄 외듯 추천해주었다. 민재와는 정치 얘기가, 선우와는 영화 얘기가 기가 막히게 잘 통하는 여자였다. 민재와 선우는 둘이 있을 때에도 이 재미있는 이웃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낯선 곳에서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지적 허영이 충족되는 친구를 사귀게 된 건 행운이라 느껴졌다. 춘천으로 이사 오기 전에 영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썩 괜찮은 오락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서점에서 책들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전혀 화려할 것 없고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작은 서점에서 책들이 어느 날엔 한두 권씩, 어떤 주에는 총 예닐곱 권씩 사라졌다. 선우와 민재는 세미나를 들으러 오는 회원들의 소행인지, 문학 번역 스터디를 하러 드나드는 대학생들 짓인지 이런 저런 의심을 해본다. 그러다 마침내 독립 서점이라는 순수하고 고상한 공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CCTV를 설치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동안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혹은 민재가 당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눈인사를 하며 들어왔던 옆집 여자, 영주가 이 모든 책을 훔쳐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만다. 주로 집 앞이나 현관에서만 얘기를 나눴지 서점엔 자주 들르지도 않았던 영주를 의심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한번 올 때 여러 권씩 한꺼번에 훔쳤기 때문이었다.
두 서점 주인은 마침내 영주를 불러 묻는다. -도대체 왜 그렇게 책을 훔쳐 가셨어요. 궁지에 몰린 영주는 조소를 내비치며 대답한다. -제가 그걸 읽으려고 가져갔겠어요? 저 거기 있는 책들, 애저녁에 다 읽은 거에요. -그럼 뭐에 쓰시려고…… -글쎄, 그냥 두 사람 삶에 빈 칸 만들고 싶었나 봐요. 민재와 선우는 당황한 채 되묻는다. -빈 칸이요? -네 빈 칸. 정답 사회에서 도망친 삶의 모범 답안처럼 사시잖아요. 난 도망쳤지만 여전히 낙제고. -…… -보상 다 해드릴게요. 어차피 이번 계절 학기 끝나면 좀 긴 여행 떠나려고 했어. 두 분은 계속해서 그 완전무결해 보이는 힙스터 라이프 잘 이어가세요. 미안했어요.
민재와 선우는 황망해진 서로의 눈을 마주본다. 우리의 춘천은 끝끝내 완벽한 대안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