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지난 여름을 떠올렸다. 그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가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심상과 필요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지나치게 집중할 수 있었다.
기주를 처음 본 날 지은은 기주까지 포함해 네 명의 또래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디자이너인 지은의 친한 회사 선배가 친구들과 놀다가 지은을 부른 자리였다. 기주는 키가 컸고 피부색이 진했으며 프랑켄슈타인처럼 얼굴 골격이 발달해 강인하면서도 다소 우울한 인상을 풍겼다. 그들 중 거의 말수가 없는 편에 속했고 이따금 지은의 말에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온갖 화제들이 오간 밤이었지만 그들에게 ‘개념녀 코르셋’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느라 열변을 토했던 대목이 지은은 귀갓길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 때 기주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지은은 이불 속에서 몇 번이고 몸서리를 쳤다.
다음 날 지은은 선배에게 물어 기주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오빠, 저 어제 봤던 지은인데. 친해지고 싶어서 제가 번호 물어봤어요.
오빠라는 단어의 정치적 해방은 나 같은 애들 때문에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하며 지은은 카톡을 썼다. 어젯밤 기주가 입고 있던 얇고 목이 적당히 파인 흰 티를 떠올리며 답장을 기다렸다. 답장은 두 시간 후에 왔다.
-안녕하세요. 어제 많이 마셨는지 완전 뻗어 있다 지금 일어났어요.
기주는 능숙했다.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친절했으며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 뭐하냐며 지은을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뭐? 지은은 볼을 꼬집었다.
-저희 쉐프가 후보 메뉴들을 몇 개 만들어 볼 건데, 사실 상 타깃인 지은 씨가 와서 신랄하게 맛 평가 좀 해줘요.
기주는 두 달 뒤 친구들 몇몇과 녹사평에 식당을 개업할 예정이었다. 일요일 4시까지 본인이 마실 술만 들고 오면 된다며 그는 곧이어 집주소를 지은에게 보내줬다.
경리단길 기업은행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 해방촌 옥탑방에 도착할 때까지 지은은 기주의 티셔츠 핏에 반해 기꺼이 이 언덕길을 올라온 여자가 자기 말고도 족히 10명은 더 있을 거란 상상을 하며 걸었다. 긴 여름 해가 천천히 넘어가는 방향을 마주 보며 걷느라 인중에 빽빽히 땀이 맺혔다. 마침내 휘청대는 3층 계단까지 올라 기주의 작은 옥상에 들어섰을 때 마주한 풍경은 지은의 머릿속 그것과 사뭇 달랐다.
옥탑방 바깥에 차려놓은 테이블엔 기주의 동업자 친구 한 명, 인테리어 업자 두 명, 쉐프, 그리고 기주만 앉아 있었다. 이미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느낌이었지만 지은은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괜한 어색함에 저 기주 오빠랑 엊그제 만난 사이에요- 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인테리어 업자라는 이들은 보광동에 작은 사무실을 차려놓고 일하는 남매였다. 그 중 누나라는 사람은 지은의 취향에 꼭 맞는 흑갈색 히피펌에 어깨 각이 들어간 린넨의 빈티지 프린팅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빡빡머리의 동생은 누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고, 유학 시절 떨을 폈다가 파티의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꿈틀이로 보였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지은은 정말로 이들에게 흥미가 일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이것 저것 물어봤다. 기주는 처음 만난 또래의 사람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지은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와중에 쉐프가 내어온 감자부리또와 아보카도프라이즈는 지극히 평범한 맛이었고, 그 와중에도 지은은 진심과 예의를 절반씩 섞어 특유의 성심성의 어린 말투로 피드백을 해주었다.
두 시간쯤 지나자 소나기가 내렸다. 인테리어 남매는 동생의 스쿠터 위에 올라 함께 사라졌다. 나머지 네 사람은 테이블을 대강 정리하고 옥탑방으로 들어왔다.
-누가 이거 밖에 놔뒀어?
쉐프와 친구를 동시에 힐난하는 듯 외치며 기주가 허둥지둥 방으로 들고 온 건 PVC 소재로 된 지은의 클러치였다. 지은은 집주인에게 가방을 넘겨 받으며 또 웃었다.
-물 털어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
소나기인줄 알았던 비는 제법 오래 내렸고 맥주는 각자들 서너 병씩 해치운 상태였다. 쉐프가 김치전을 해 먹자는 아이디어를 내자, 기주는 김치가 아랫방에 있는데 거기 사는 이와 싸웠기 때문에 지금 내려가긴 곤란하다고 얼버무리며 그 안을 기각시켰다. 지은은 의아한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이내 다시 자신이 요즘 구독하는 유튜브 콘텐츠 얘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비가 그쳤다.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고 기주가 옥상에 걸어둔 작은 전구들이 빛을 냈다. 네 사람은 슬리퍼를 끌고 다시 옥상으로 나와 맥주를 한 병씩 더 마셨다. 화제는 다시 타투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은의 발등에 있는 타투는 우사단로에 있는 타투샵에서 받은 거였고 쉐프의 팔뚝에 있는 건 합정 산(産)이었다. 둘은 각자의 타투이스트들 인스타그램 계정을 서로에게 소개해줬고 기주는 물끄러미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지은은 기주의 시선이 느껴지는 모든 순간이 떨렸다.
-오빠들, 쉐프님,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너무 오래 머물렀다 싶어진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주가 택시 잡는 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 일어났다. 다시 그 쓰러질 듯 휘청대는 옥탑 계단을 나란히 내려와 땅이 발에 닿자, 기주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TMI긴 한데 실은, 아랫방 사는 사람이 전 여친이에요. 한창 좋을 땐 같이 살아보려고 이 집으로 이사를 했거든. 근데 너무 자주 싸워서 좀 힘드네요.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지 꽤 됐는데 딴 전세방 못 구해서 아직 이러고 있죠, 뭐.
-아, 그러시구나.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혼잣말에 가깝도록 나지막이 대답했다.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동안 말수도 별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긴 문장을 줄줄이 쏟아내니 놀라울 뿐이었다. 기주한테 마음이 있기야 했지만 명시적으로 고백이라도 한 적은 없으니 이건 뭐 돌려 전하는 거절의 의사도 아니요, 반대로 잘 해보려고 미리 말하는 거라면 더더욱 괴상하다. 기주 말대로 확실히 TMI긴 하지만 또 알아두니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잠시 생각하다 지은은 속으로 마음 먹었다. 아래 집에 전 여자친구가 살거나 말거나 지금은 공식적으로 헤어진 상태라니 나는 상관 않고 직진한다. 그런 것쯤이야. 정말로 지은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택시가 소월길을 따라 남산으로 접어들 때쯤 띠링, 하고 지은에게 문자가 왔다.
-[Web발신] 법무법인 가원입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2018드합30 이혼 및 재산분할 사건 2018. 8. 19. 312호 조정실 16:00 참석 바랍니다.
지은은 호르륵, 한숨을 내쉬다 문득 택시 안 냉방이 춥게 느껴져 가방에서 가디건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그래, 자신 없으면 기주랑 그 여자처럼 먼저 같이 살아보기라도 하던가 결혼은 뭣하러 또 이렇게 일찍 했나 몰라. 이젠 썸 타는 일마저 버겁군. 반지 자국이 남아있는 약지를 만지작거리며 지은은 중얼거린다.
-이 자리에 타투나 하나 더 할까.
서른이 목전으로 다가온 여름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들의 시간보다 부지런히 떠나는 청춘의 뒷모습이 눈 앞에 선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