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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Jan 28. 2023

상실과 애도의 시간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

※ 마블 영화/드라마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불리는,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일련의 히어로 시리즈는 일종의 ‘분기’ 개념을 도입했다. 마블은 이것을 ‘페이즈’로 지칭하는데 ‘페이즈1’ 은 아이언맨과 헐크,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를 소개한 뒤 첫 번째 협업 영화 <어벤져스>로 마무리된다. ‘페이즈2’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토르의 단독영화를 거쳐 새로운 히어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소개한 뒤 두 번째 협업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내놓고 ‘앤트맨’의 첫 번째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가장 직전에 마무리된 ‘페이즈3’은 장대한 서사시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히어로들이 분열한 뒤 동시에 닥터 스트레인지와 스파이더맨, 블랙 팬서의 첫 번째 이야기가 진행된다. 앤트맨의 두 번째 솔로 영화에서 ‘다중우주’ 떡밥을 던지는 와중 토르는 SF로 장르가 확장되고 지상 최악의 적 ‘타노스’의 등장으로 인해 분열된 상태였던 히어로들이 다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로 재결성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 유명한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인해 지구의 생명체 절반이 사라진다. 새로운 히어로 ‘캡틴 마블’의 탄생기를 거친 뒤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통해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히어로들의 연합작전을 보여주고, 스파이더맨의 두 번째 이야기인 <파 프롬 홈>은 페이즈3를 닫음과 동시에 인류의 절반이 사라졌다 돌아온 이후 혼란의 사회상을 슬쩍 암시한다. 그리고 2021년부터 새로운 분기, ‘페이즈4’가 시작되었다.     


 최대한 간략하게 압축해보려 했으나, 2008년의 <아이언맨>으로부터 시작한 14년간의 연대기다보니 간략하게 간추려지지는 않았다. 초기의 MCU는 매력 있는 히어로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경활동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였으나 페이즈3 부터는 온 우주의 운명을 건, 거의 신화적 단계에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뛰어드는 히어로들의 숭고함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페이즈3에서 MCU를 이끌어 온 두 개의 구심점.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퇴장한다.     


 2021년부터 시작한 ‘페이즈4’는 이전의 MCU와 조금 다른 형식을 택했다. 마블 스튜디오의 본사인 ‘디즈니’는 자체 OTT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를 런칭했다. 디즈니 플러스는 마블 시리즈를 킬러 콘텐츠로 배치함과 동시에 자체적인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한다. 2021년 한 해 동안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가 총 4편(<완다비전>, <로키>,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이다. <로키>의 경우 MCU가 앞으로의 서사를 전개하는 데 주요한 설정으로 밀고 나갈 것이 확실한 ‘다중우주’의 개념을 정립하는 일종의 주춧돌로서 기능하는 작품이다. 로키라는 캐릭터 자체가 지닌 매력이야 충분하지만, 다른 3편의 시리즈.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가 공통적으로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는 조금 이질적으로 떨어져 보인다. OTT의 비약적 발전 한 켠에서 마블은 드라마의 형태를 통해 영화와는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으로 온 지구의 사람들이 특정한 한 명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 이 얼토당토않은 세계의 인과율 안에 놓인 드라마들이, 기이하게도 MCU에게 핍진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불러낸 것이다.     


단독자와 비단독자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의 큰 공통점은 이 드라마들의 주인공들이 MCU 안에서 단독자로서의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데 있다. <완다비전>의 주인공 ‘완다 막시모프’는 MCU 안에서 중요한 장소인 가상의 국가 ‘소코비아’에서 폭격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난민이며 빌런 집단 ‘하이드라’의 의해 생체실험을 당했고, 그것을 통해 염력의 초능력을 지녔다. <완다비전>의 또 다른 주인공 ‘비전’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의해 만들어진, 비브라늄(MCU 세계관 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금속 물질) 신체와 고귀한 정신을 지닌 피조물이다. MCU 내의 ‘단독자’ 히어로들.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 토르 등이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든 혹은 출생부터 시작되는 어떤 사명에 의한 것이든 간에 주체적으로 각성한 히어로인 것에 비해 완다와 비전은 외부로부터 목적으로 인해 조형된 피조물에 가깝다.      


 <팔콘과 윈터 솔져>의 주인공인 ‘팔콘’은 이전의 MCU 영화 시리즈 안에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동료이자 조력자 이상의 어떤 역할을 부여받은 적이 없다. ‘윈터 솔져’는 슈퍼 솔져 혈청을 맞아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1942년 시점에서의 스티브 로저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 ‘버키 반즈’이자 그 자신도 슈퍼 솔져 혈청을 맞고 빌런 집단 ‘하이드라’에 의해 세뇌되어 테러리스트가 되었다가 현대 시점에서 세뇌를 극복해 히어로가 된 캐릭터다. 즉, <팔콘과 윈터 솔져>의 두 주인공 팔콘과 윈터 솔져는 단독자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없으면 그 자체로 설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호크아이>의 주인공 ‘호크아이’는 첩보기관 ‘쉴드’에 소속된 현장요원이면서 궁술의 명수이지만, 역시나 ‘어벤져스’ 등 히어로들이 협업해 공동의 적과 대적하거나, 혹은 히어로들이 대립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등지에 출연한 캐릭터다. 드라마 <호크아이>에서 히어로들의 팬이자 호크아이의 팬이면서 새로운 히어로로 소개된 ‘케이트 비숍’이 캐릭터 호크아이에게 ‘존재감이 없는 게 문제’라는 드립을 던질 정도로 호크아이는 그 자체의 서사를 갖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는 이 비단독자 캐릭터들. 누군가에 의한 종속변수였던 캐릭터(팔콘, 윈터 솔져)나 조형된 피조물 캐릭터(완다 막시모프, 비전), 초인적 능력을 갖지 못한 인간(호크아이)들의 드라마를 제작하는 결정을 내린다. 물론, 이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영역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갖게 된 건 산업적 측면에서 단독영화를 만들기에 파괴력이 적은 캐릭터들이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로 전제한다 해도, 이들의 드라마는 MCU의 세계를 더욱더 정밀한 세계로 조형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서두에 지적한 대로 이들은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처럼 어떤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스파이더맨처럼 유명인이 되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히어로가 아닌 시민들이 겪어내야 할 보통의 감정들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은 중간지대에 놓이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드라마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도출된다. 디즈니 플러스의 MCU 페이즈4 드라마 연작.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는 모두 하나의 현상. MCU내에서 ‘블립’이라고 칭하는 사건인 타노스의 핑거스냅의 의한 인구 절반의 실종과 아이언맨의 핑거스냅의 의한 이들의 복귀를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히어로들에게도, ‘상실’은 예외가 아니다.      


상실을 다루는 첫 번째 태도 – 사이코 드라마     


  <완다비전>의 초반 에피소드는 비영어권 국가의 시청자에게 있어선 접근의 장벽이 높은 편이다. <완다비전>은 50년대부터 시작해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시트콤’을 패러디하고 있다. 특히나 1964년부터 72년까지 방송된 시트콤 <Bewitched> (한국방영 제목 <아내는 요술쟁이>. 1975년 한국 ‘동양방송’에서 방영한 바 있다)는 <완다비전>의 어떤 뼈대를 이룬다. <아내는 요술쟁이>는 아내와 장모가 마법사인 남자가 천신만고 끝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가족 코미디 드라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지점이 있다. <완다비전>의 또다른 주인공 ‘비전’ 역시 마법사는 아니어도 그 태생이 비범한 어떤 존재다. 이 ‘비범’함을 한번에 보여주는 장면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비전이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들어 올리는 장면이다. 토르의 망치 ‘묠니르’는 무거워서가 아니라 무기가 사용자의 ‘자격’을 판정하기 때문에 쉽게 들리지 않는 무기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히어로들이 모여있을 때 하나같이 묠니르를 드는 내기를 하는 장면에서 히어로들은 전부 실패한다(단, 여기서 한 명의 히어로는 들 수 있었지만 토르의 자존심을 존중해 일부러 들어올리지 않는다. 이 암시는 5년 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가서야 밝혀진다) 그런데 비전은 묠니르를 가볍게 들어 토르에게 건네준다. 즉 비전은 고결한 정신과 강인한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묠니르를 들어 올릴 자격을 갖춘 캐릭터다.      


  이미 보았듯, 비전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사망했다. 비전의 이마에는 ‘마인드 스톤’이라는 도구가 박혀있다. 이 도구는 타노스가 ‘핑거 스냅’을 하기 위해 모아야 했던 목표 중 하나였다. 비전은 이 사태를 막기 위해 힘의 근원인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고 희생하기를 선택한다. 이미 비전과 정서적으로 깊은 관계가 된 완다 막시모프는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고 자신의 연인을 사망케 하는 가혹한 운명에 내몰리고 결국 실행한다.


 그러나 타노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든 ‘타임 스톤’. 즉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권능을 통해 비전이 사망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결국 마인드 스톤을 비전에게서 강탈해 간다. 인류의 절반이 되돌아오는 <어벤저스: 엔드 게임>에서도 결국 비전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데 <완다비전>에서 비전은 멀쩡히 이마에 ‘마인드 스톤’을 박은 채로 살아 움직인다. <완다비전>의 1화에서 완다 막시모프가 염력을 사용해 그릇을 옮기는 장면에서 실수로 그릇이 비전의 이마에 닿고 그릇이 깨진다. 그때 비전의 대사는 “그릇을 날게 하는 내 아내”, 완다 막시모프의 대사는 “깨지지 않는 머리의 내 남편”이다. 그런데 이미, 비전은 머리가 박살나서 사망했다.      

 <완다비전>의 초반부에서 ‘비전’은 고결한 능력자로서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미 죽은 비전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한편 완다 막시모프와 비전의 결혼생활은 사실성이 완벽히 배제된 ‘재현물’로 묘사된다. 하루 만에 임신과 출산이 완료되고 아기에서 소년으로 단시간 내에 자식들이 성장하는 이 괴기한 시트콤은 이것의 정체를 추적하는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이 드러난다. 이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감정이, 앞서 언급한 ‘상실’의 테마다. 즉 완다 막시모프는 본인이 어벤져스의 멤버로 전 지구적 재앙에 맞서 싸운 히어로이나 동시에 자신의 연인을 잃은 비극을 겪은 인물이다. <완다비전>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비극을 겪은 이가 ‘히어로’이자 ‘마법사’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한 결과물이다. 온전히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던 이야기는 이 순간부터 갑자기 극도의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완다 막시모프의 행동양식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패턴을 보이고 완다 막시모프가 소코비아에 거주하던 어린 시절 열광했던 것이 ‘미국 시트콤’이었다는 설정이 따라붙는 순간 초반부의 괴기한 시트콤은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이동한다. 연인의 상실을 겪은 초능력자 히어로는 연인이 살아있는 대체역사를 창조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사고체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미국 시트콤’의 세계를 허구로 직조해 낸다. <완다비전> 속 두 개의 축. 완다 막시모프가 속해있는 ‘미국 시트콤’의 세계(50년대 시트콤부터 2000년대의 <오피스>, <모던 패밀리>에 이르기까지 깨알같이 패러디된다) 는 사실 완다 막시모프의 사이코 드라마이고, 바깥의 사람들은 이 세계를 균열 내고 완다 막시모프를 현실의 시간으로 데려오기 위해 투쟁한다. <완디비전>은 MCU의 세계에서 상실을 직접 마주하는 첫 번째 시도다. 그리고 이 시도의 형식이 MCU 세계의 익숙한 방식인 액션 드라마가 아니라 심리 스릴러다. 이 형식은 MCU가 그간 피상적으로 다뤄온 정서적 영역. 즉 ‘히어로의 고뇌’ 같은 일차원적 주제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한다. 완다 막시모프를 평범한 인간. 연인의 상실을 겪고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지상의 인간과 같은 심리를 가진 존재로 끌어내림으로써 MCU의 세계는 핍진성을 획득한다.      

상실을 다루는 두 번째 태도 – 난민인종, PTSD   

  

 MCU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첫 번째 솔로 무비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빌런은 ‘벌처’라는 캐릭터다. 폐기물/청소 용역업체를 운영하는 건실한 시민 에이드리언 툼스가 사건을 겪고 악인으로 변화한 것이 ‘벌처’인데 이 캐릭터가 결정적으로 악인이 된 계기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관련이 있다. MCU의 세계관에서 ‘뉴욕 사태’로 불리는, 2012년 영화 <어벤져스>에서 벌어진 로키의 지구 침공 이후 뉴욕은 초토화된다. 에이드리언 툼스는 이 초토화된 뉴욕을 청소하는 업체의 대표로 악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토니 스타크의 영향력 아래있는 정부 기관 ‘데미지 컨트롤’이 피해 복구를 전담하게 되면서 에이드리언 툼스의 일감을 빼앗아 간다. 에이드리언 툼스의 악인 정체성인 ‘벌처’는 세계를 정복하겠다거나 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빌런이 아니다. 가족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만들어주고 싶은 소시민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악인이다. 물론 악인이기 때문에 히어로 영화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처벌을 받게 되지만,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MCU의 세계에서 이전의 히어로 영화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지점을 주목하는 유의미한 시도가 되었다. 히어로 영화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지반이 부서지고 하는 부수적 피해는 일상이다. DC 코믹스의 영화 시리즈 <DC 확장 유니버스>의 대표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같은 작품을 보면 잭 스나이더의 특기대로 영화 내내 건물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 부수적 피해는 조명되지 않는다.     


 히어로들이 막아내야 하는 재난의 크기에 비해선 사소해 보이는, 하지만 땅에 발붙인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도는 <팔콘과 윈터 솔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팔콘’와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동료이자 친구들이다. 동시에 그 자체로는 단독 서사를 갖기 어려운 캐릭터다. 특히 ‘팔콘’의 경우 어떤 특수한 능력을 가진 초인 히어로라기 보다는 그저 우수한 군인이다. ‘팔콘’과 ‘윈터 솔져’ 모두 타노스의 핑거 스냅이 불러일으킨 인류 절반의 증발 사건, ‘블립’에 휘말려 사라진 캐릭터들이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이 캐릭터들이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기점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다.      


 드라마가 두 캐릭터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1회는 시종일관 가라앉아있다. 특히 ‘팔콘’의 경우, MCU가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를 묘사하면서 보여준 ‘소시민’적 상황을 다시 겪는다. 5년간의 블립 이후 돌아온 팔콘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신이 없는 동안 힘들게 가족을 지켜온 누나가 경제적 곤경을 극복할 방법으로 부모님의 유산인 ‘배’를 팔겠다고 선언하고, 팔콘은 은행 대출을 받아 위기를 넘기려 하지만 ‘5년’간 무소득자인 팔콘에게 대출을 해줄 수 없다는 은행의 통보를 듣는다. 이 에피소드는 히어로들의 ‘경제문제’를 다룬 흔치 않은 장면인데 압도적 부자인 토니 스타크나 현상금 해적단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아스가르드의 왕 토르 같은 캐릭터를 묘사하면서 ‘경제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군인이라는 신분만 제외하면 일반인에 가까운 팔콘의 경우 경제적 상황을 타개해야 하고 은행에 대출받아야 한다. 이것이 무산되는 일련의 시퀀스는 <어벤져스> 멤버 역시도 ‘블립’ 이후이 혼란한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블립’ 이후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첫 번째 시도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사라졌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정도의 묘사(<완다비전>의 핵심 캐릭터 중 한 명인 ‘마리아 램보’가 갑자기 복귀한다거나) 는 있었지만, ‘블립’ 이후의 혼란한 사회상과 인간들의 사고체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작품은 <팔콘과 윈터 솔져>가 처음이다. 히어로들이 빌런과 전투하는 과정에서 부서지는 건물과 지반파괴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 탄생하는 ‘벌처’처럼, <팔콘과 윈터 솔져>의 빌런 집단 ‘플래그 스매셔’는 블립이 발생한 직후. 인류의 절반이 사라진 상태가 더 나았다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페이즈 4가 진행중인 MCU에서 현재까지 가장 강력한 적은 ‘타노스’ 였다. ‘타노스’의 공포는 그의 의도. 인류의 절반을 증발시키는 것이 타노스 자신이 세운 사고체계 안에서는 완전히 ‘선의’ 라는 데 있다. 타노스는 오히려 ‘극단적’ 환경주의자에 가깝다. (보편적 환경보호 활동가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타노스의 사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구가 소화해 낼 수 있는 자원의 폭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개체당 생존율과 수명은 점점 늘어난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인류 모두는 공멸하고 지구 역시 소멸할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인구의 수를 줄여 지구의 자원을 좀 더 더디게 사용하고 잔존 인류는 조금 더 여유롭게 사용해야만 멸종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일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모두의 생명을 놓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이 나온 이들은 살아남고 뒷면이 나오는 이들은 증발시키자. 그래서 타노스의 행동양식을 설명할 때, 물론 어느 정도의 농담이 개입되어 있겠으나 ‘공리주의’가 언급되었던 것은 이래서이다. 최대 다수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니까. 그리고 어쨌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이것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어벤져스 멤버들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다시 블립을 초기화 시키기 전까지의 5년간. 실제로 인류의 절반은 소멸하였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이 기반 위에서 시작한다. 살아남은 인류는 이전의 삶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간단한 상상. 인류의 절반이 사라진다면 빈집이 몇 개가 새로 생길까? 블립 이전과 이후의 취직 경쟁률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사라진 이들이 돌아온 순간, 말 그대로 아수라장일 것이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블립되었던 히어로들이 돌아오는 장면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졌겠지만, 사라졌던 이들이 돌아온다면 과연 살아남았던 이들과 안정적으로 융합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아니오’다. 히어로 군단의 멤버인 팔콘 조차도. 더욱 엄격해진 은행의 대출심사를 넘지 못한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플래그 스매셔’라는 난민 집단. 즉 블립 이후 되돌아온 사람들에게 원래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길거리로 내몰린 난민집단의 멤버들이 새로 조합된 ‘슈퍼 솔져 혈청’,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가 맞았던 바로 그것을 맞고 테러를 벌이는 이야기다. 동시에, ‘캡틴 아메리카’가 퇴장 한 이후 다시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기 위해 다시 투쟁에 나서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MCU 내의 드문 흑인 히어로인 ‘팔콘’은 드라마 안에서 ‘인종’ 문제를 사유하게 만들고(일례로 흑인 소년이 팔콘을 ‘흑인 팔콘’이라고 부르자 팔콘은 ‘너는 그럼 흑인 꼬마냐?’라고 묻는다. 굳이 ‘흑인’이라는 인종 구분적 표현을 붙일 이유가 없는 곳에 자연스레 붙이면서 차별적 사고가 확산하는 것을 은유한다) 세뇌로 인해 악행의 도구로 쓰였던 윈터 솔져는 끊임없이 악몽을 꾸며 PTSD에 시달리고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들의 삶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길잡이였던 캡틴 아메리카가 부재한 상황에서, 불안정한 사회는 계속 서로를 배제하고 혐오하고 배격하며 끝내 테러로 이어진다. ‘캡틴 아메리카’의 상실은 단순히 영웅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견뎌 나갈 희망의 부재다. 그래서 남은 이들에겐 캡틴 아메리카를 이어 여전히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할 의무가 부여된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이 ‘의무’를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두 명의 히어로를 통해 MCU 안의 세계를 더욱 현실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옮겨놓음과 동시에, 동시대의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히어로 영화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것이 정밀하고 날이 바짝 서 있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MCU는 자신들이 펼치는 거대 서사시 아래에 잠복한 미시적 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있음을 증거하는 데는 충분하다.     


상실을 다루는 세 번째 태도 – 화해     


 MCU의 세계에서 히어로가 ‘사망’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블랙 위도우는 MCU의 세계에서, 엄정한 표현이 아님을 무릅쓰고 표현하면 자의적 죽음에 성공한 유이한 캐릭터다. 첫 번째 사례. 아이언맨의 영웅적 희생은 페이즈3 까지의 MCU가 결국 이 한 장면을 위해 달려온 여정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상하게 부재하는 애도의 자리가 하나 있다.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기 위해 어벤져스 멤버들이 벌이는 강탈전에서 호크아이와 블랙 위도우는 ‘소울 스톤’을 찾으러 간다. 여기서 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키면 소울스톤을 얻을 수 있다’는 설정을 듣는다. 이전에 타노스는 자기 딸 가모라를 희생시키고 소울스톤을 얻었었다. 호크아이와 블랙 위도우는 초인 히어로들 사이에서도 드문 ‘일반인’에 가까운 히어로(블랙 위도우의 솔로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 역시 완전한 일반인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이고 함께 싸워온 동료이자 일종의 유사 가족이다. 그리고 소울스톤을 얻기 위한 선택의 기로에서 둘은 자신이 희생되려 하고 결국, 호크아이가 소울스톤을 얻은 채 귀환한다. 드라마 <호크아이>는 블랙 위도우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캐릭터인 호크아이가 블랙 위도우의 상실을 겪은 다음의 이야기다.      


 <호크아이>는 <완다비전>이나 <팔콘과 윈터 솔져>에 비해서 서사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완다비전>이 최종장에 가선 신화 속에 나오는 흑마법사까지 소환하는 사이즈의 이야기고, <팔콘과 윈터 솔져>는 정부 요인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공격이 주요 서사인 점에 비해서 <호크아이>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껄렁패들이 빌런으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후반부로 가면 거물급 범죄자가 하나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야기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공개된 작품답게 <나 홀로 집에>와 <다이하드>의 영향력이 짙게 보이고 안전한 ‘가족서사’로 수렴된다는 점도 그렇다.      


 오밀조밀한 서사 안에서 <호크아이> 역시 ‘부재’의 테마를 풀어나간다. 호크아이는 자신이 살아남고 모두를 위해 희생한 블랙 위도우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지 못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결국 블랙 위도우가 사망한 뒤 멤버들이 잠시 슬퍼하지만 이내 블랙 위도우의 유지를 받들어 블립을 되돌리기 위한 작전에 매진하는 장면을 되짚어 보면, 인류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불사한 블랙 위도우에 대한 애도는 충분하지 못하다. 앞서 이야기한 ‘부재하는 애도의 자리’인 것이다. 블랙 위도우에 대한 정중한 애도는 드라마 <호크아이>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호크아이는 털어내지 못한 죄책감을 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진할 것을 어벤져스의 기념비 앞에서 맹세한다. 그리고 ‘호크아이’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블랙 위도우의 동생 옐레나와 대면한다. 

    

 다시, <완다비전>과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의 공통점은 히어로들의 ‘애도’에 있다. 이미 죽었거나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비전,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들은 직접 캐릭터가 드라마에 출연하건 하지않건 간에 끊임없이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떠난 이들은 모두 고결한 정신을 가진 히어로들이고 남겨진 이들은 떠난 이들의 유지를 받들어 더욱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임에 있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히어로들의 행동방식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성장하는 보편의 방식을 따른다. 최근 상영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결말까지 함께 생각해보면,(‘애도’와 ‘상실’의 테마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MCU는 히어로들을 점점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원심력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물론 한 켠에서 새로운 신화와 마법의 세계관(<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이터널즈>)을 구축하고 있지만 이전 페이즈부터 넘어온 캐릭터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애도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 태도는 영화에 문학적 기운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MCU의 페이즈4는 향후의 마블이 블록버스터-히어로 영화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작가주의 영화’의 요소를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작동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선택은 현실의 시간을 위안하는, MCU식 위로일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예술과젠더연구소의 학회지 <NW 4.5>를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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