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길버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 이 세상이 잔인한 건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많은 선택권을 처음부터 주지 않는다는 거지.
L: 네 멋대로 살아. 누가 뭐래? 여태껏 그렇게 살았잖아. 다만 네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 넌 모르니까 그 장점도 있다고 말해주려는 거야. 그렇다고 네가 철저한 독신주의도 아니잖아?
E: 내 멋대로 살라고? 말은 그럴듯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대개는 그가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가 어지간한 괴짜가 아니라면 지독히 외롭고 비참하게 살 거라고 말하지.
L: 실제로 혼자선 외로울 걸? 삶에서 결국 무엇을 얻겠어. 나는 결혼하고 애를 낳고 키우면서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행복을 얻었어. 그건 경험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거야. 너도 지금 그걸 모르니까 이러는 거고. 가족을 위한 고통과 희생이 두려워? 그게 인간을 성숙하게 해주는 거야.
E: 나는 그게 싫어. 혼자인 사람을 미성숙한 삶을 사는 것처럼, 마치 미완성된 인격체로 보는 그 태도가! 물론 나는 언니가 얻은 것들을 알지 못해. 아마 앞으로도 경험 못할 행복일지 모르지. 그럼 반대로 언니는 혼자 사는 서른 일곱, 혼자 사는 마흔의 삶을 알겠어?
L: 그걸 꼭 겪어봐야 알까. 하지만 아이를 갖는다는 건 겪지 않으면 정말 모르지.
E: 아니, 언니도 평생 모를 거야. 나도 와보기 전에는 몰랐으니까. 백 명이 있으면 말이야. 백 개의 삶이 있고, 그 이상의 행복과 절망이 있어. 이 세상의 문제는 말이야. 그 중에서 하나의 행복과 하나의 절망 빼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는 거야. 가족을 이룬 사람의 행복 하나. 그리고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절망 하나.
L: 솔직히 말할까? 조금 철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야. 그래, 이기적으로 보여. 결국 그런 삶엔 자신밖에 없는 거잖아. 누구나 조금씩은 자신을 희생하고 무언가를 얻는 건데 말이야. 안정적인 직업과 적당한 평수의 집, 차, 결혼의 안정감…. 자녀가 커가며 노후를 준비하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 행복들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줄 알아? 평범한 행복도 그렇게 얻기 쉬운 게 아니야.
E: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묻고 싶은 건 이거야. 내가 그것들을 원한다고 단 한 번이라도 말한 적이 있었어?
책 속에 등장하는 이태리 현지의 고급 식당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이성이 차려질 정도로 평범하게 맛있는 홍대의 한 이탈리안 식당이었다. 우리 자매, L과 E는 서로 물어뜯을 듯 소리 지르고 있었다.
포크가 상대의 얼굴 앞에서 휘둘러지고, 대낮이었지만 와인잔이 벌컥벌컥 비워졌다. 그날 언니는 육아에 지친 끝에 오랜만의 나들이로 들떠 있었는데 즐거운 식사를 기어이 망치고서야 나는 뒤늦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돼 버린 걸까. 첫 시작은 서로를 위한 덕담과 위로의 말이었는데 말이지.
직업부터 아파트 평수, 결혼생활과 자녀수까지 대한민국 성인 여자의 행복의 표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언니를 앞에 두고, 내 자신이 부러움을 느끼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아니 부러울 때도 분명 있었는데 어느덧 그게 언젠지 잊어버렸다. 지금의 언니는 한없이 안쓰러웠으니까. 세 아이를 육아하느라 휴직 중인 언니는 땡볕에 내놓은 화초같은 얼굴이었다. 잠시 집을 떠난 것만으로도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언니의 고통과 희생이 어딘가 과소평가돼 있다고 느꼈다. 또 나의 외로움과 불안은 어딘가 과대평가돼 있다고. 나는 단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언니가 행복을 위해 희생한 것들이 과연 그렇게 사라져 마땅한 것이었냐고. 그리고 내 외로움과 불안이 꼭 나의 선택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지 않느냐고. 행복은 때때로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먹고 기도하라 사랑하라>, 작가에게 쏟아진 비난들
이 책의 작가는 출간 10주년을 기념한 서문에서 이 책에 쏟아진 비난에 대해 언급한다. 비난의 대부분이 ‘흔치 않은 특권’때문이었다며, 자신의 선택은 특별한 경우였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꼬박 1년이나 쉬면서 세계 여행을 할 정도로 부유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며, 훌륭한 종교적 스승을 만나 몇 달 씩 명상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고.
작가는 그것이 내 길이었지, 당신의 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여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는 것.
“쓰레기통이 너의 삶이라면 받아들여라. 더 많이 포기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라고. 너의 삶의 너만의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는 등의 메시지는 잘못되었다고.
대신 작가는 여성들에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길 바랐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온전히 당신 것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이 책이 발간되던 2006년으로부터 14년이 흐른 2020년에도 유효한가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렇다고 느낀다. 적어도 우리집 자매들의 식탁에서는 유효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것을 굳이 얼굴을 붉히며 논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으로, 삶의 모습으로, 행복한 얼굴과 여유가 흐르는 부드러운 말투로 전할 수도 있을 테니까. 날카로운 논쟁 속에서는 전혀 전해진 것 같지 않지만, 내가 그날 언니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단지 이런 것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어떤 희생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을 거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도 없을 거야. 누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 것이라면 행복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 다만 확실한 불행이 있다면 그 내면의 목소리를 아예 못 듣거나 잘못 듣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는 거지. 그런데 대체 그걸 누가 미리 알 수 있겠어. 우리는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인 걸.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상처주거나 무시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난 언니의 날선 잔소리조차 사랑이라는 걸 아는데.”
작가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할 것을 선택했다. (결국 사랑할 때가 가장 행복해보이긴 했지만)
그 무엇으로 빈 칸을 채우든지 중요한 전제는 그것이라는데.
다음 빈 칸을 채울 때, 주변 그 누구의 소리도 듣지 말고 오직 자신 내면의 소리만을 들어야 할 것.
내 자신이여, OO하고, OO하고, OO하라.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나의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일 수 있다는 말에, 과연 얼마나 동의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