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이라고 믿는 일시적인 순간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인생의 선택을 맡기며 살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과거가 스스로 입증하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순간이야말로 어느 때보다 ‘낭만적’으로 느껴지기에, 우리는 삶의 방향을 크게 뒤흔드는 이 위험할 만큼 매력적인 순간들에 기꺼이 삶을 내던진다.
‘낭만’이란 일종의 드라마틱한 ‘상상유희’
낭만적 세계는 현실 세계와 닿기 전까지만 유효한 일종의 드라마틱한 ‘상상유희’다. 실제로는 일상과 수천 광년쯤 떨어져 있음에도 낭만적 세계는 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신기루의 모습으로 현실과 섞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백화점 쇼윈도 너머로 반질반질 빛나는 세련된 가죽 가방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저 가방이 내 현실에서 쇼윈도 속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며 내 비루한 현실을 빛내줄 거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낭만적 상상에 이끌려 가방을 유리상자에서 꺼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게 된다.
전시되어 있던 가방은 꽤 완벽에 가까워보였으나, 내 일상에 자리한 가방은 다른 얼굴로 모습을 바꾼다. 수많은 잡다한 생활용품들과 뒤섞여 구겨지고, 짓이겨지며, 실용성을 입증하면 할 수록, 그것은 처음 내뿜고 있던 설렘과 낭만을 상실해간다.
우리는 낭만이 없어진 가방을 옷장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두는 것으로, 실패를 잊고 또 다른 낭만을 꿈꾼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사로잡는 새 가방은 늘 그렇듯, 저 멀찍이 쇼윈도 안에서 빛을 내며 우릴 기다리고 있다. 낭만은 그렇게 쉽게 현실 속으로는 들어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한다. 상상 속의 세계는 언제나 바래지질 않으니까.
알랭 드 보통, 타자화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불편함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너’와 ‘나’로 존재하는 특정 타자들의 일상을 통해 ‘우리’로 일반화될 수 있는 강력한 공감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술을 발휘한다. 마치 나 자신의 일상을 타인의 시각이 되어 관찰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특히, 무수한 결점과 오류들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담담한 순간들이 모여서 매우 차갑고 날카로운 성찰(뼈를 때리는 지적에 가까운)에 이르게 만든다. 하지만 그 아픈 지적들이 또 얼마나 무수한 공감의 버튼을 누르는지.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라비의 사랑은 약점을 보완해주는 강점들과 자신이 열망하는 자질들을 (상대에게) 발견한 것에 대한 논리적 반응이다. (...) 한편, 사랑은 약점에 관한 것, 상대방의 허약함과 슬픔에 감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中에서 -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다. 내가 감정적인 끌림보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 인격적으로 내가 열망하는 경지에 이미 다다른 사람을 원한다고 말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언니가 툭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네 이상형은 요약하면, 4대 성인쯤 되는 거네."
"...뭐라고?"
"네가 원하는 건 부처님, 예수님이라고. 차라리 종교에 귀의하면?"
깔깔거리는 웃음이 이어졌다. 따라 웃어넘기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것은, 어딘가 대차게 의표를 찔린 듯한 감각때문이었다. 차마 그들도 한 때는 사람의 아들이었잖아, 따위의 비루한 합리화를 입밖에 낼 용기는 없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왜일까. 내 인격적인 결함이나 재능적인 부족함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쩐지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엄격한 잣대는 늘, 현실적인 파트너를 만드는 데는 거의 유효하지 않았음에도.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결혼’을 버리지 못하는가? 작가는 현실의 결혼 생활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왜 결혼을 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하게 만든다. '낭만'의 환상이 걷히며 드러나는 처참한 민낯이란.
만약 상대방이 항상 이렇게 되는대로이거나, 반대로 항상 이렇게 엄격하다면 뭔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中에서 -
하지만 이에 대한 작가의 – 흐릿하고 애매모호하고 그럴듯하지도 않은 – 답변은 무책임하게도 우리가 ‘선택하라’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결혼을 선택해도 좋지만, 매우 까다롭고 절망적인 좌절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결혼할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요구는 꽤 타당하다.
그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인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했을 때 필요한 필수적인 준비사항임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킨다. 또한, 결혼을 환상이 아닌 현실로 직시하게 만든다. 이 책 전체에서 아이들의 육아와 훈육은 가장 낭만에서 거리가 먼 부분이라는 점에서도 우리가 결혼을 현실로 바라보게 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낭만을 믿다가는 결혼이 ‘재난’이 된다
보통의 냉정한 충고는 결혼을 현실적으로는 상상해본 적이 아직 없는 나에게 매우 생생한 가르침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귀담아 들었고, 지나가듯 흘려 넘기지 않기로 했다.
“서로에게 완벽함을 포기할 것,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할 것,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자각할 것, 상대가 까다로운 것이 아니며,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될 것, 행복하게 가르침을 주고받을 것”
이것들이 매우 뼈아프게 남았던 만큼, 같이 ‘낭만적’이고 싶은 연인과는 꼭 이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엔 반드시 고백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안다. 물론 그 직전까지 아주 아주 망설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