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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1. 2020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나무나 봐요"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어릴 때는 소설 읽는 일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누군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오직 내게만 들려주는 듯한 어설픈 오만함에 스스로를 젖어들게 하는 일.


하지만 정작 누군가의 불행과 오욕의 역사는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고통이 덜어지는 느낌이 드는 거였다. 왜일까. 나는 분명 들어주는 자였는데, 어느새 털어놓은 자가 된다. 홧홧하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헛헛하게 가슴이 비워진다. 그리고 환한 조명 아래 오래된 상처들을 하나둘씩 발견하는 것이다. 잊고 산 줄 알았던 내 과거의 어느 지점들. 수술대 위에 조명 받으며 벌거벗겨진 몸뚱아리처럼 무기력하고 적나라한 고통의 기억들.


내 비명이 타인의 입을 빌어 증폭되는, 슬픔의 만끽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중에서 -


울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아리애스터 감독의 호러영화 ‘미드소마’를 떠올렸다. 초반 잠깐의 어둠이 지나가면 영화는 시종일관 환한 대낮이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 겉으로는 평온한 시골마을에서 행해지는 엽기적인 모습들은 밤의 공포가 아닌 낮의 공포라는 이유로 더욱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진다. 환한 빛 아래 드러난 모든 엽기적인 진실들은 숨김없이 뻔뻔하게 실체를 드러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자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애매하다. 나의 표정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이기에.


숨을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한낮의 공포. 우리가 ‘없는’ 척 가장하며 잊고 싶었던 것들을 두 눈 뜨고 낱낱이 목도해야 하는 ‘버젓이 있음’의 재확인.


영화의 주인공 대니는 여러 번 길게 오열한다. 그런 그녀를 붙잡고 커다랗게 소리내어 함께 울어주는 것은 연인이 아니라 낯선 마을의 낯선 여자들이다. 그 대낮에 벌어지는 기이한 오열의 합창. 네 상처를 숨길 필요 없다는 듯이, 우는 척 곡소리만 내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울어주는 여자들의 들썩이는 어깨들. 그 열렬한 오열의 합창에 나는 문득 동참하고 싶어졌었다. 통곡이 커다란 파도처럼 그녀의 어깨에 넘실거릴 때, 내 비명이 타인들의 입을 빌어 증폭되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 통곡의 소리를 만끽하고 싶었다. 슬픔의 만끽. 비장한 고통의 하모니. 주파수를 맞춘 통곡의 연대. 더 슬퍼해도 돼, 더 울어도 돼, 부추기는. 울어 울어. 더 더 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날의 감정이 다시금 복받치는 것을 보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 공감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열렬히 이해받고 싶었다는 것을. 불가해한 고통의 세계에 나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을.


늘 '버젓이' 존재했던 너와 나의 슬픔들


“나는 네가 나를 자꾸 단짝이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 미웠어, 화가 났어. (…) 그런데 내가 이렇게 울고 있다니, 네가 죽었을까봐 이렇게 무섭다니….” -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중에서 -


예전엔 아픔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내 아픔에 공감해줄까 혹은 누가 네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까 감히, 하는 식이었다. 기대하지 않는 자의 가면을 적당히 쓰고는 그것들을 태연히 유산시켰다. 그렇게 태어나보지도 못한 슬픔들이 무덤처럼 쌓여갔다.


그래,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지 하고. 공감은 우습다고, 유령 같은 말이라고. 그런 게 존재한다고 믿는 자의 그럴 듯한 헛된 기대감 같은 것에 실망해 결국 나락에 떨어질 뿐이라고.


그랬지만 역시 이런 소설을 읽으면 헛된 기대가 부푼다. 김금희의 소설도 그랬다. 잠시나마 아픔에 공명하는 울림이 들렸다. 환청처럼. 그 순간만큼은 뜨겁게 차오르는 무엇이 분명 있었다. 우리들의 슬픔은 늘 거기에 있었으니까. 없는 척 한다고 해서 ‘있음’이 ‘있지 않음’이 될 수는 없으니까.


필용 씨, 양희 씨, 조중균 씨, 세실리아와 이모 그리고… 개. 마지막 책을 덮기 직전 나는 누구의 삶과 가장 닮아 있나 생각했는데 모두와 조금씩 닮은 것 같았고, 또 조금도 닮지 않은 것도 같았다. 다만 조중균 씨에게 부디 따뜻한 밥 한 끼를 해주고 싶었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군가의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중에서 -


하지만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양희 씨가 이끌어 앉혀주는 의자 하나가 아닐까. 너무 환한 한낮이어도 좋으니 그저 누군가 내민 의자 하나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썩 앉아버리면 진심으로 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양희 씨는 어디에든 는 것 같아도 좀처럼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필용이니까.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서 돌아서서 몰래 우는 사람들이니까.


우리 모두 저마다의 양희 씨들이 필요한 게 아닐까. 우는 것을 비웃지 않고 보아주기만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슬픔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것도 아니니까. 침묵으로 오열의 주파수를 맞춰줄 수 있는 사람. 느티나무같은, 양희 씨같은, 말없이 내어진 무심한 의자 같은 사람.


실은 버젓이, 늘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우리의 슬픔을, 조용히 보아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무심한 듯 툭, "나무나 봐요, 그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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