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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Apr 13. 2021

내 돈이면 달라지는 것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 때면 어김없이 나를 찾는 이들이 있다. 봄볕에 꽃 피듯 생기가 돋을 즈음 우리의 만남도 시작된다. 서울에 한 협동조합을 찾아 나섰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협동조합 지원 사업에 제출할 사업계획서를 지도하기 위해서다.      


다섯 번째 마지막 만남이 있던 날.

이사장님 준비된 사업계획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발표하는 겁니다. 한 분은 녹음해주세요.

뻘쭘한 듯 연신 입맛 다시던 이사장은 우물대며 입을 뗐다.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한지 삼십 분째. 구구절절 장황했던 설명이 끝났다.   

  

지금껏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묻고 답하며, 사실을 따져봐야 할 차례다.

이사장이 긴장의 끈을 내려놓은 듯, 긴 한 숨을 내쉴 찰나. 훅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사장님이 생각하는 협동조합은 무엇인가요?

공동사업을 위해 주식회사가 아닌 협동조합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협동조합이 있기에 조합원이 있나요? 조합원이 있기에 협동조합이 존재하나요?

우리가 해결하려는 결핍은 무엇일까요?     

  

한 번 시작된 질문은 쉼 없이 이어졌다.

공동장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공동장비를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때 차이를 숫자로 비교해주세요.

선정하려는 개발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알려주세요.

홍보비용이 이 만큼 필요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기대효과를 서술하지 말고, 수치로 말해주세요.  

  

질문이 거듭되자 이사장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이내 말문이 터졌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확인하나요. 지금이 한 참 바쁠 때라 시간을 쪼개 틈틈이 준비했는데 그 정도까지 하려면 힘들어서 하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마주하며 숨을 골랐다.

이번에 우리가 지원하는 금액이 얼마죠?

일억입니다.

조합에서 순이익 일억을 얻으려면 일 년 매출이 얼마가 돼야 하죠.

아마 육억은 벌어야 할 겁니다.     

육억 벌어 일억을 남기려면 일 년이 걸리는데 우리는 20일 동안 잠 못 자고, 고생스럽다고 이 난리입니다.     


여러분이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묻는데 답하지 못하는 건 납득이 안 갑니다. 말할 수 없다는 건, 해보지 않았거나 잘 모른다는 겁니다. 흰 종이에 적힌 내용들은 그저 생각에 불과하고 스스로 그 타당함을 검증하지 못한 거겠죠. 지원받으려 쓰지 말고, 조합의 진정한 성장을 말하려는 계획들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선정보다 더 중요한 건 신뢰를 얻는 일입니다. 몇 번 질문해보면 다 느껴집니다. 잘 성장하는 곳인지, 해보겠다는 절실함과 진심이 담겨 있는지 알아챕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요.

선정에만 연연하지 마세요.

내 일이다 생각하고, 내 돈을 쓰는 거다. 여기세요.

그래야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내 돈이면 그래요.

공돈이라 생각하면 적당히 쓰기 마련입니다.   

  

좋은 사업계획서를 써 내려가는 건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 마음먹에 따라 적당히 쓰기도, 진심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컨설턴트는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이가 아니라, 바른 생각을 새겨 넣는 조각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번 새기면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요.    

 

좋은 컨설턴트는 홀로 서도록 돕는 사람이에요.

그 시작은 마음을 다잡는 일입니다.

제 생각입니다.      



ps. 사업계획서 대신 써달라는 분들 사절입니다.

      저는 홀로서기만 돕습니다.

      그게 더 보람 있고, 뒷맛이 개운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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